— 설치비 별도
자, 그렇다면 정말로 달아보자.
댓글창에 온도계를.
물론 공구는 필요 없다. 망치로 모니터를 두드리거나, 드라이버로 키보드를 분해할 일도 없다. 다만 세 가지 설치 옵션이 있으며 각각의 장단점이 있고, 어느 것 하나 ‘시원찮다’는 점에서 이미 우리네 세상사와 많이 닮았다.
첫 번째 옵션 : 요즘 인기쟁이 AI한테 맡기기
(실은, 인공지능도 눈치는 빵점이다.)
그래도 가장 그럴싸한 방법부터 만들어 보자. 댓글을 타이핑하는 순간, AI가 그 문장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온도를 숫자나 색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정말 대단하세요!"를 치면 열정의 주황빛으로 32°C가 뜨고, "이게 글이에요?"를 치면 차가운 파란빛으로 5°C가 표시되는 식이다. 일정 온도 이하로 내려가면 전송 버튼이 잠시 회색으로 바뀌면서 이런 문구가 뜬다.
"이 문장을 보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시겠어요?"
꽤 그럴싸하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
AI는 ‘맥락’이랑은 거리가 한참 멀다. 잘 모른다는 뜻이다. 20년 지기 친구에게 "야, 이 인간아, 진짜 잘 썼다"라고 치면 AI는 당장 빨간 경보등을 켜며 0°C를 띄울 것이다. 그게 아닌데.
반면 "귀하의 글은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치면 아무 문제없다는 듯 35°C의 온기를 부여할 것이다. 실은 인사치레인데. 이런 말 따윈, 실은 가장 차가운 무관심의 표현일뿐인데.
결국 AI 온도계의 가장 큰 단점은, 이게 사람의 마음 온도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맥락’을 제대로 읽지 못하니까. 정작 사람의 온도를 제일 잘 아는 건 AI가 아니라 사람이다. 우리는 그 사실을 굳이 AI를 써봐야 다시 깨닫게 될 것이다. 괜히 돈만 낭비한다.
두 번째 옵션 : 내가 직접 고르기
(혹은, 양심을 슬라이더로 조작하기)
그렇다면 AI 말고, 사람이 직접 온도를 고르면 어떨까. 댓글창 옆에 작은 슬라이더 하나를 붙여두고,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딱 한 번 묻는 것이다.
"이 댓글의 온도는 몇 도입니까?"
A: 차갑게, B: 보통, C: 따뜻하게, D: 뜨겁게.
단순하다. 하지만 이 단순함 속에 이 방법의 진정한 매력이 숨어 있다.
측정이 목적이 아니다. 잠깐 멈추게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트위터가 공격적인 답글을 보내기 전 "정말 전송하시겠어요?"라고 묻는 실험을 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손가락을 거둬들였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 짧은 1초의 질문이 꽤 많은 화살을 허공에서 멈춰 세운 것이다.
슬라이더를 A 쪽으로 밀면서도 전송 버튼을 누르는 사람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적어도 자신이 지금 차가운 말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누르게 된다. 무의식의 냉기와 자각한 냉기는, 받는 사람에게 어떻게 닿는지는 몰라도 보내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분명히 다른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이 방법의 가장 큰 순기능은 따로 있다. D를 선택하려던 사람이 잠깐 손을 멈추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뜨거운가, 아니면 그냥 화가 난 건가?'
세 번째 옵션 : 온도는 관계가 결정한다
(혹은, 온도계는 처음부터 우리 안에 있었다)
앞의 두 방법이 문장의 온도를 다뤘다면, 이 방법은 결이 다르다. 관계의 온도를 쌓아가는 것이다. 난 개인적으로 이게 제일 좋다. 누군가에게 말을 한다는 것, 친하고 싶다는 뜻이니까.
누군가의 글에 처음 댓글을 달면 15°C에서 시작한다. 답글이 오가면 25°C가 된다. 그 사람의 다음 글에도 찾아가고, 그 사람도 내 글에 찾아오고, 그렇게 서로의 문장 앞에 반복해서 멈춰 서다 보면 온도는 서서히 올라간다. 어느 날 댓글창 옆에 조그맣게 이런 문구가 뜬다.
"자주 대화를 나누는 분입니다."
이 방법은 사실 온도계라기보다 '관계의 달력'에 가깝다.
오늘 나눈 댓글이 내일의 안부가 되고, 그 안부가 모여 어느 순간 '우리 사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 글에서 그토록 아쉬워했던 단막극이 아니라, 다음 회가 기다려지는 연속극이 되고 시리즈가 되는 거다.
단점은 구현이 복잡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사람 마음이라는 게, 온도가 40°C까지 올라갔다가도 말 한마디에 다시 영하로 뚝 떨어지는 일이 생긴다는 점이다. 바로 ‘변덕’ 혹은 ‘변심’이랄까. 그래서 이 온도계에는 리셋 버튼이 필요할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그것도 관계의 일부라고 받아들이거나.
그래서 셋 중 어떤 온도계가 가장 좋냐고 가장 객관적인 답을 묻는다면, 솔직히 말하겠다.
세 가지 다 달아야 한다.
AI가 일단 문장을 한 번 훑고, 슬라이더가 나에게 한 번 묻고, 관계 온도계가 우리 사이의 히스토리를 조용히 기록한다. 그래야 스토리가 되니까. 이 세 겹의 장치가 합쳐져야 비로소 하나의 댓글이 단순한 타이핑이 아니라 온도를 담은 말이 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장치보다 훨씬 정확하고, 훨씬 빠르고, 설치비도 전혀 들지 않는 온도계가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 딱 1초, 이 문장이 상대에게 닿는 순간을 한 번 상상해 보는 것. 그게 전부다. 그 1초짜리 온도계만 제대로 쓸 수 있다면, 사실 나머지는 다 필요 없는 이야기다.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아니까. 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댓글을 다는지.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지금 내 몸 상태가 어제처럼 여전히 시원찮다. 어제보다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오늘 날씨보다 조금 높은, 29°C쯤 되는 것 같다.
댓글 달기 딱 좋은 온도인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