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앗이는 ‘마중물 붓기'까지만
※ '품앗이'로 고민하던 중, 한 팔로워 작가님의 이름을 통해 새로운 사유와 성찰을 얻었습니다. 작가님의 '지혜로운 이름'에 감사드립니다.
● AI의 질문: 품앗이 거절에 관한 글을 발행한 후에도 여전히 ‘좋아요’를 눌러주시는 독자님은 몇 % 인가요?
○ 나의 대답: 20일이 지난 현재, 기존에 ‘좋아요’를 눌러주시던 독자님의 약 30% 정도.
● AI의 대답: 그래도 다행입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독자분들이 남아 계시네요.
온전한 품앗이란?
펌프에서 물이 나오지 않을 때 한 바가지 붓는 물을 '마중물'이라 부릅니다.
그 물이 있어야 땅속 깊은 물을 펌프질로 끌어올릴 수 있지만, 마중물 자체를 마시려고 펌프질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마시면 될 물을 굳이 펌프에 부었다가 다시 끌어올려 마신다면, 그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어 보일 뿐입니다.
저는 디지털 플랫폼의 품앗이도 이와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글을 막 시작한 이에게 서로의 방문과 좋아요는 분명 큰 도움이 됩니다. 아무도 읽지 않는 막막한 공간에 글을 올리는 일은 생각보다 오래 버티기 어렵고, 첫 반응 하나가 계속 써 내려갈 힘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마중물이 어느새 '목적'이 되어버리는 순간입니다.
연주자가 박수받는 기쁨에만 취해 정작 악기를 연습하고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일을 소홀히 한다면 어떤 결과를 얻게 될까요? 작가가 되겠다고, 나름의 글을 창작하겠다고 나선 지망생이 마중물에만 만족한다면, 그 꿈과 성장은 아마 그 자리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피드백의 상실
“의무로 주고받는 반응은 '신호'가 되지 못한다.”
저는 독자의 반응과 댓글을 일종의 ‘신호등’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의 반응은 작가에게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글이 지금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어디에서 멈추고 어디로 향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계속 그렇게 가도 좋다는 파란불, 잠시 지나쳐도 괜찮지만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노란불, 그리고 여기서는 멈추어야 한다는 빨간불.
내 글이 독자들에게 제대로 읽혔는지, 어느 대목이 마음에 닿았는지, 어디서 머뭇거렸는지를 알려주어 다음 글이 나아질 수 있도록 이끄는 신호등입니다.
언젠가 한 작가님이 제 글에 댓글로 조언을 주시면서 정작 '좋아요'는 누르지 않으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의미를 잘 압니다. 사실 저 역시 같은 습관이 있습니다.
댓글은 달지만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 것은 잊어버려서가 아니라, 글의 내용에 대해 나만의 다른 판단과 생각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분들은 글을 전혀 읽지 않으신 듯한데도 좋아요만 잔뜩 누르고 가시곤 합니다. 이럴 때는 제 글의 부족함을 정직하게 마주할 피드백의 기회를 잃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본래 독자의 반응이란 글의 방향을 잡아주는 피드백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품앗이로 주고받는 좋아요에는 이런 신호를 제대로 담기 어렵습니다.
비록 따뜻한 응원은 될지언정, 상대는 글에 감동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방문 확인' 차원에서 눌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답례로 나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예의라는 이름으로 남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좋아요가 100개 달려 있어도 누가 글을 제대로 읽고 눌렀는지, 누가 순수한 응원으로 눌렀는지, 누가 품앗이로 눌렀는지 구분할 길이 없습니다.
마치 사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 고장 난 신호등처럼.
잘 쓴 글과 대충 쓴 글 모두에 똑같은 반응이 돌아오면, 피드백이 사라진 자리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만 남게 됩니다. 결국 글쓴이는 자신이 성장하고 있는지, 퇴보하고 있는지, 어디가 부족해 더 노력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심지어 자신의 글이 대단하다고 착각하는 덫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관계의 착시
“교환으로 모인 이들이 과연 '내 독자'일까?”
제가 가끔 댓글로 이야기를 나누는 한 작가님은 지난 몇 년 동안 팔로워 수나 방문자 수에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계획에 따라 꾸준히 글을 쓰고 바카라까지 출간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과연 팔로워 수와 방문자 수가 출간 작가의 작품성과 명성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까요?
품앗이로 얻게 된 수많은 팔로워와 방문자는 창작자에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들은 정말 내 글이 마음에 들어서 머무는 걸까요, 아니면 '서로 주고받는 관계'를 위한 수치를 쌓기 위해 온 걸까요?
그들이 머무는 이유에는 '글'보다 '교환'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커 보입니다. 제 글 자체에는 별다른 관심 없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발도장이 목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찍어주었으니 당신도 오라"는 무언의 요구를 남긴 채 말이죠. 그리고 그 요구에 답하지 않으면 이내 발길을 끊어버리곤 합니다.
최근 저는 1년 전에 올린 글들을 다시 재발행하고 있습니다.
다시 읽어보니 지금의 글과 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느낍니다. 이전보다 나름의 발전이 조금은 있었다는 생각에 안도하기도 합니다.
사실 그동안 몇 분의 작가님들과 메일을 통해 진솔한 의견을 주고받은 덕분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독자란 이처럼 칭찬과 매를 함께 들어주는 분들이 아닐까 합니다.
플랫폼에서의 활동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진정성과 진솔함을 담은 창작을 지향한다면, 이러한 고통스럽지만 진실된 피드백은 반드시 함께해야 하지 않을까요.
정체성의 변질
“숫자에 맞추기 시작하면 평균을 닮아간다.”
가장 무거우면서도 침묵 속에 다가오는 위험은 바로 정체성의 변질입니다.
침묵의 살인자라 불리는 고혈압처럼.
저는 고혈압이 있어 늘 식단에 신경 쓰고 약을 챙겨 복용합니다. 그런데 좋아요와 조회수라는 수치가 가끔은 고혈압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글을 발행하는 순간 두 수치가 오르는 경험은 즉각적이고 달콤한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얼큰한 매운탕 국물, 단짠단짠 치킨, 거기에 딱 한 잔. 중독성 강한 맛이지만 혈압에는 치명적입니다. 그 순간에는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몸에 어떤 영향을 줄지 두려워집니다.
달콤한 보상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글을 쓴 뒤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는 좋아요 숫자, 기분 좋게 만드는 하트와 정형화된 댓글들.
이것들이 주는 달콤함 역시 그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 보상에 익숙해지면 글쓴이는 무의식적으로 '어떤 글이 반응이 좋은가?'를 기준 삼아 주제와 문장을 고르게 됩니다. 소신을 지키려 노력하더라도 중독이 심해지면 결국 무난한 주제, 익숙한 결론, 누구도 불편해하지 않을 무해한 표현만 남게 됩니다.
더 곤란한 것은 이 과정이 스스로를 얽매는 굴레가 된다는 점입니다.
숫자가 기준이 되면 수치가 떨어지는 것이 불안해지고, 불안함 때문에 다시 품앗이에 의존하게 되며, 결국 그 숫자에 맞춘 글을 쓰게 됩니다. 이 순환 속에 오래 갇혀 있을수록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글이 무엇이었는지'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반응이 없을 것 같은 글은 시도조차 하지 않게 되고, 결국 글은 나를 닮기보다 '플랫폼의 평균'을 닮아갑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쌓아온 숫자가 아까워 멈추기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수치가 주는 중독 증세입니다.
마중물은 쓰되, 펌프질을 멈추지 않기를
그렇다면 품앗이를 완전히 끊어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글을 막 시작하는 단계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이웃을 찾아가는 일은 자연스럽고 따뜻한 과정입니다. 다만, 가끔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방문은 정말 이 글을 읽고 싶어서일까, 아니면 답례 때문일까?"
"이 숫자가 늘어나는 동안, 내 글은 정말 나아지고 있는 걸까?"
"좋아요와 조회수가 나오지 않아도, 나는 이 글을 계속 쓸 수 있을까?"
만일 이 세 질문의 답이 '의무와 숫자'에 가까워졌다면, 그것은 이미 마중물을 충분히 부었다는 신호일 것입니다.
이제는 표면적인 숫자를 넘어, 땅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나만의 이야기'와 '진정한 독자'를 향해 스스로의 힘으로 펌프질을 시작할 때입니다.
타인의 마중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그것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맑은 샘물을 퍼 올려 서로에게 진정한 울림을 나누는 것.
그것이야말로 글쓰기 플랫폼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매력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