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노마드의 유혹_10
디지털 노마드라는 이름의 진통제
우리는 도피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그것은 패배자의 낙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도망쳤다는 말은 싸움에서 졌다는 말과 같고, 졌다는 말은 약하다는 말과 같고, 약하다는 말은 이 슬롯에서 살아남을 자격이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도피하고 싶을 때마다 그럴듯한 명분을 찾는다.
그중 가장 세련되고, 가장 반박하기 어렵고, 가장 소셜미디어 피드에 잘 어울리는 명분이 바로 디지털 노마드다.
"나는 한국의 경직된 조직 문화가 싫어서 떠나는 게 아니야. 글로벌한 감각을 익히고 시야를 넓히기 위해 떠나는 거야."
과연 그럴까.
한국의 연봉이 내 가치를 증명하지 못할 때, 서울의 아파트값이 내 미래를 가로막고 있다고 느낄 때, 나이는 쌓이는데 통장 잔고는 그 속도를 따라오지 못할 때, 우리는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없는 게임판을 엎어버리고 싶어 한다. 게임을 잘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게임 자체가 나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게임판을 바꾸는 쪽을 선택한다.
그때 디지털 노마드는 훌륭한 탈출구가 된다.
낯선 이국땅에서 나는 더 이상 집 없는 청년이 아니다. 야근을 밥 먹듯 하는 평범한 온라인 게임인도 아니다. 승진 경쟁에서 밀린 정체된 대리도 아니다. 나는 그저 노트북을 들고 세상을 누비는 자유로운 전문가로 치환된다. 현지인들은 내가 얼마를 버는지, 한국에서 내 직급이 무엇인지, 내 부모님이 임대 아파트에 사는지 알지 못한다. 알 필요도 없다. 나는 그저 이방인이다. 그리고 그 이방인이라는 정체성이, 한국에서 쌓인 모든 맥락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느낌은 가짜가 아니다. 실제로 해방감이다. 그리고 그 해방감이 진짜이기 때문에, 이 선택이 도피가 아니라 용기 있는 전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해방감과 문제의 해결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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