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과 편견』과 『혼불』이 보여준 사랑과 선택
가을이면 청첩장이 하나둘 날아든다. 뜨겁던 공기가 한풀 꺾이고 햇빛이 순해질 무렵, 주말 일정표가 빼곡하다. 10월에만 예식장에 가야 할 일이 세 번이다.
한 장의 청첩장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적힌다. 신랑과 신부가 나란히 서서 하객을 마주하고 인사를 한다. 서로 사랑해서, 서로를 선택해서 저 자리에 섰겠구나.
그런데 『혼불』 속 효원의 혼례는 너무도 당연하게 여겼던 한 가지를 다시 묻게 했다.
저 두 사람은 정말 서로를 선택했을까.
최명희 선생의 『혼불』은 일제강점기 전후 전북 남원의 한 종가를 중심으로 사람들의 삶과 풍속, 말과 음식, 계절의 살림을 촘촘하게 담아낸 대하예술소설이다. 나는 요즘 이 작품을 천천히 읽으며 오래된 생활의 풍경을 하나씩 들여다보고 있다.
1권 초입에서 대실(효원의 친정동네)의 효원은 매안 이씨 종가의 장손 강모와 혼례를 치른다.
두 집안은 혼서지를 주고받고 혼례를 준비한다. 집안과 집안이 이어지는 큰일이니 챙길 절차도, 따질 것도 많다. 주변은 그렇게 부산한데 정작 혼사의 한가운데 놓인 효원은 놀랄 만큼 담담하다.
열여덟 살 효원은 태어나 자란 집을 떠나 낯선 집의 며느리가 된다. 한 사람의 삶이 통째로 자리를 옮기는 일인데도 새색시에게 으레 기대할 법한 들뜸이나 풋풋한 설렘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신랑 강모는 효원보다 세 살 어린 열다섯 살이다. 의젓하기는 하지만 체구가 자그마하고 얼굴에는 분홍빛이 돌아 꽃잎 같은 소년이다. 초례청에서도 신랑이 곱고 이쁘다는 아낙들의 수군거림이 자자하다.
그 곁의 효원은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수줍고 다감한 새색시의 풋내보다는 큰 키와 골격에서 일종의 위엄이 번져 나오는 처녀다. 앳되고 고운 신랑과 당당한 체격의 신부. 나이도, 생김새도, 풍기는 기운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혼례청에 나란히 선다.
하지만 둘 사이를 벌려놓은 것은 외모만이 아니었다.
강모에게는 이미 강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 소년에게 집안에서 정해준 신부가 반가울 리 없다. 효원의 큰 체격 역시 강모에게는 마뜩잖았다.
그럼에도 혼례는 치러진다.
사람들의 축복 속에 의식은 순서대로 이어지고, 두 집안은 신랑과 신부를 부부로 묶는다. 낮의 초례청만 바라보면 아무것도 틀어진 것이 없다.
그러나 밤이 되자 낮 동안 갖추었던 모든 의식이 힘을 잃는다.
강모는 효원의 혼례예복조차 벗겨주지 않은 채 먼저 잠든다.
혼례는 이미 끝났고 잠든 강모와 혼례복 차림인 효원. 부부로서 시작이라 부를 만한 일이 두 사람 사이에는 없다.
효원의 서러움은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했다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더 서늘한 것은 그 혼례가 겉으로는 아무 탈 없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집안은 이어졌고 예식은 치러졌다. 그러나 혼인 당사자인 두 사람의 마음만은 어디에도 자리를 얻지 못했다.
그 대목에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떠올랐다.
교회 고등부 교사를 하던 때, 나는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오만과 편견』을 읽어보라고 권하곤 했다. 이성교제를 시작하는 나이에 꼭 읽어봐야 할 바카라이라고 여겼다.
지금 생각하면 라떼 세대의 오지랖 같은 권유였는지도 모르겠다. 청소년들도 이미 저마다의 방식으로 사랑과 이별을 겪고, 어른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감정을 지나간다. 이제는 이 바카라 한 권으로 이성교제를 배울 수 있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권하고 싶다. 사랑은 단번에 완성되는 감정이 아니라 서로를 기다리고, 알아가고, 바라보며 한 걸음씩 건너가는 징검다리와도 같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바카라이기 때문이다.
『오만과 편견』과 『혼불』은 쓰인 나라와 시대도 다르고, 혼례의 풍속도 전혀 다르다. 그러나 결혼을 두 사람만의 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오만과 편견』의 베넷 집안에는 딸이 다섯이다. 딸들에게 재산을 넉넉하게 물려줄 수 없는 형편에서 베넷 부인에게 결혼은 낭만만의 문제가 아니다. 재산과 지위를 가진 남자는 딸의 앞날과 집안의 안정을 좌우할 좋은 혼처였다.
콜린스의 청혼도 가족에게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그는 베넷 씨가 세상을 떠나면 한정상속 규정에 따라 베넷 가족이 살고 있는 롱본 영지를 물려받게 될 친척이다. 엘리자베스가 그와 결혼한다면 가족의 불안을 어느 정도 덜 수 있다.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콜린스의 청혼을 거절한다.
조건이 나빠서가 아니다. 마음에 없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다아시의 청혼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가 엄청난 부를 가진 귀족 청년인데다 아가씨들의 선망의 대상인 줄 알면서도 당시의 마음으로는 그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후 다아시를 다시 바라보고, 자신의 오해를 깨닫고, 다아시 역시 달라진 뒤에야 그의 손을 잡는다.
그러고 보면 『오만과 편견』의 중요한 부분은 누가 누구와 결혼하느냐만이 아니다.
누구와 결혼하지 않을 것인가를 스스로 말할 수 있다는 것.
엘리자베스에게는 ‘아니오’라고 말할 자리가 있다.
효원에게도 그런 자리가 있었을까.
이 혼사가 마음에 드는지, 강모와 살고 싶은지, 어떤 남편을 바라는지 묻기 전에 집안의 결정과 혼례의 절차가 먼저 움직인다. 효원은 이미 짜인 길 위로 들어간다.
강모에게도 자신의 뜻대로 혼인을 정할 여지는 없었다. 마음에는 강실이 있는데 집안에서 마련한 혼례청에 선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온전히 선택하지 않은 혼인 안에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그 혼인이 어긋났을 때 두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몫은 같지 않았다.
강모는 돌아서서 잠들 수 있었다. 효원은 혼례복을 벗지도 못한 채 그 거절 앞에 남겨졌다.
이 차이가 아프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맺어진 강모의 답답함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답답함이 효원에게 건넨 냉대를 가볍게 만들지는 않는다. 집안이 정한 혼인의 결과를 가장 먼저 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사람은 효원이었으니까.
한쪽에서는 재산과 계급이, 다른 한쪽에서는 가문과 법도와 규례가 혼인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두 작품이 향하는 곳은 다르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는 서로에 대한 오해로 시작한다. 결혼하기 전에 부딪치고, 거절하고, 다시 바라본다. 마음의 변화가 먼저 일어나고 결혼이 뒤따른다.
효원과 강모는 반대다.
혼례가 먼저 두 사람을 부부로 만든다. 그리고 그날 밤, 그 안에 마음이 들어 있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이제 효원의 담담함은 무심함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정말 무심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혼사가 마음 하나로 달라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기쁘다고 해서 더 가까워지는 길도 아니고, 싫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길도 아니었다면, 열여덟 살 처녀가 가질 수 있는 표정은 그런 담담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고, 결혼을 둘러싼 풍경도 크게 달라졌다.
오늘의 우리는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결혼하지 않는 삶도 선택할 수 있다. 그래도 막상 결혼 이야기가 나오면 직업은 어떤지, 경제력은 어떤지, 양쪽 집안은 잘 맞는지, 사는 방식은 비슷한지, 취미생활은 하는지 여러 조건을 살핀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사는 일에서 조건을 완전히 지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조건이 아니라 순서인지도 모른다.
조건을 갖추고 나면 마음도 따라올 것이라고 믿는 것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뒤 함께 살아갈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은 출발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가을이다.
사랑하기에도, 결혼하기에도 좋은 계절이다. 주말이면 또 누군가는 화려한 예복을 입고 사람들 앞에 나란히 설 것이다.
그때 『혼불』의 초례청에 선 효원과 강모, 먼 영국에서 청혼 앞에 자기 뜻을 말하던 엘리자베스가 떠오른다.
결혼식에는 수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가족도 필요하고, 축하해줄 사람도 필요하고, 살아갈 형편도 필요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갖추고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서로가 서로를 선택하는 일이다.
덧)
어쩌다 보니 『혼불을 엿보다』라는 카지노 게임까지 만들어 글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회차가 거듭될수록 작품도 낯설고, 제가 꺼내는 추억이야기와 지역색, 시대 배경도 멀어 공감하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저는 쓰는 동안 즐거웠습니다.
남은 두 편의 글을 추가하여 열 편을 채우고 마무리 하려 합니다.
낯선 이야기인데도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