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내 유일한 여자중학교. 찬기가 감도는 교실로 들어선 친구들이 가방에서 대뜸 볶은 콩을 꺼냈다.
그날이면 양은도시락 가득 콩을 챙겨 오는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친구들은 뚜껑을 열기 전부터 도시락을 마구 흔들었다. 안에서 콩알들이 잘그락잘그락 부딪히는 소리부터 교실에 풀어놓았다.
콩 볶는 날이었다.
뚜껑을 열면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검은 서리태가 양은도시락 안에 수북했고, 살림이 좀 큰 집 아이들은 땅콩을 섞어오기도 했다. 먹어보라는 말 없이도 우리는 한 움큼씩 입에 털어 넣었다. 아침에 볶아 아직 온기가 남은 콩은 더 고소했다.
평소 같으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앞머리에 물을 바르고, 손거울과 머리빗을 꺼내 매무새부터 다듬던 친구들도 이날만큼은 고소한 냄새에 흘깃거렸다. 그러다 껍질 벗긴 콩의 갈라진 틈에 머리카락을 한 올씩 끼워 단발머리 밑으로 콩알을 주렁주렁 달고 낄낄거렸다.
콩을 가져오는 친구들은 면소재지에서 한참 떨어진 시골 마을에서 버스를 타고 통학하던 아이들이었다. 우리는 그날 콩을 볶아 먹는 까닭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양은도시락을 흔들면 그 소리를 알아듣고 몰려들었을 뿐이었다.
그 풍경은 중학교 교실 한 귀퉁이에 묵은 기억으로 남아 차츰 잊혀 갔다. 시내로 고등학교를 진학한 뒤로는 볶은 콩을 나눠 먹는 날도 내 일상에서 사라졌다.
음력 이월 초하루에 콩을 볶는 풍습을 만났다. 양은도시락 안에서 부딪히던 콩알 소리와 뚜껑을 열었을 때 번지던 고소한 냄새가 문장 하나를 타고 되돌아왔다.
사리반아씨가 효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사리반아씨는 「혼불을 엿보다」 세 번째 글 「나무화병이 데려온 방망이 노인」에서 만났던 강호의 아내다. 춘복과 당골네에게 약값을 건넸던 바로 그 강호다.
양반가의 무남독녀 고명딸인 사리반아씨 역시 학교에 다니고 공부하며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다. 양반 가문의 맷방석 같은 주춧돌로 남느니, 차라리 너른 바닷가의 모래알 하나가 더 속 시원할 것 같다는 마음까지 내비친다.
그런 사리반아씨가 이번에는 매안 이씨 종부 효원과 마주 앉아 이월 초하루의 콩 볶는 풍습을 이야기한다.
이월 초하루에는 집집마다 콩을 볶았다.
“새알 볶아라.”
“쥐알 볶아라.”
“콩 볶아라.”
콩이 “탁, 타닥, 토닥, 톡” 하고 튀는 동안 둘러선 아이들은 주문처럼 외쳤다. 그렇게 하면 집안의 노래기가 없어지고, 콩이 볶이는 것처럼 그해 농사의 병충해도 모두 볶여 사라질 것이라고 어른들은 믿었다.
콩 몇 알을 불에 올려놓고 한 해의 궂은일과 농사의 해충까지 함께 없어지기를 바랐던 마음. 지금의 눈으로 보면 하나의 세시풍속이지만, 자연의 심술 앞에서 손쓸 방도가 많지 않았던 사람들의 간절함도 그 안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명희 선생은 이 풍습을 정겨운 옛이야기로만 놓아두지 않는다. 소란스럽게 튀던 콩알 뒤에 전혀 다른 불 하나를 꺼내놓는다.
사리반아씨가 꺼낸 것은 풍습 이야기였지만, 그 말을 받아 든 효원의 마음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효원의 가슴에는 이미 삭지 않는 불씨가 들어와 있었다. 남편 강모와 사촌 강실 사이의 일, 상피를 알게 된 뒤였다. 분노할 까닭도, 서러워할 까닭도 넘쳤지만 효원은 마음껏 소리칠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종가의 며느리라는 자리는 한 사람의 감정보다 집안의 체면과 질서를 먼저 요구했다. 알고도 모르는 척해야 할 일이 있었고, 묻고 싶어도 삼켜야 할 말이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오는 액은 콩을 볶아 막아볼 수 있다. 농사에 해를 끼치는 벌레도 볶은 콩 소리에 물러가기를 빌어볼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자기 안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은 어찌할 것인가. 남편을 향한 원망도, 강실을 향한 뒤얽힌 마음도, 종부라는 자리 때문에 밖으로 꺼내지 못한 서러움도 콩처럼 솥에 넣고 볶아 없앨 수는 없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는 콩 볶는 풍습보다 효원의 한숨이 더 크게 들린다.
“노래기와 병충해는 콩을 볶아 없애고 막는다지만, 가슴속에 이는 불길을 볶아서는 무엇을 막을 수가 있을 것인가.”
앞의 콩 볶는 소리가 요란할수록 이 문장은 낮고 무겁게 들린다.
이 대목에서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가 떠올랐다.
삼룡이는 말을 하지 못한다. 효원은 말을 할 수 있지만 말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침묵은 몸에서 비롯되고, 다른 한 사람의 침묵은 종부라는 자리와 가문의 질서가 만들어낸다. 삼룡이는 주인집 아들의 학대를 견디면서도 제대로 항변하지 못하고, 주인아씨를 향한 연민과 사랑까지 가슴속에 품는다. 효원 역시 남편과 강실의 일을 알고도 자신의 분노와 서러움을 마음껏 드러내지 못한다.
두 사람은 말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말이 밖으로 나가지 못한 자리에는 감정이 남는다. 삼룡이와 효원은 서로 다른 이유로 침묵하지만, 그 침묵 속에 쌓인 응어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벙어리 삼룡이」의 마지막에는 실제 불이 난다. 삼룡이가 평생 머물며 억압을 견뎌온 집이 불길에 휩싸이고, 그는 그 불 속으로 들어간다. 눈앞의 화재는 단순한 배경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오래 눌러 담아 온 삼룡이의 감정과 실제 불이 한자리에서 맞닥뜨리는 조화다.
효원에게는 그런 폭발조차 없다. 소리 내어 부술 수도 없고, 불태우고 돌아설 수도 없다. 종부의 자리를 지키면서 자기 안에 남은 것을 끌어안고 살아가야 한다.
삼룡이에게 말하지 못한 마음은 마지막의 불길과 만난다. 효원에게 그것은 한숨으로 남는다.
삼룡이는 끝내 밖으로 터져 나오지만, 효원은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더 오래 견뎌야 한다. 같은 침묵이라도 끝내 남는 결은 다르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바깥에서 닥치는 부정한 기운을 막아낼 궁리를 해왔다. 팥을 뿌리고, 문에 무언가를 걸고, 콩을 볶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궂은 기운이라도 어떻게든 집 밖으로 밀어내고 싶었던 마음이 그런 풍습에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 안에서 시작된 것에는 정해진 처방이 없다. 콩 한 줌을 볶는 것으로 없앨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혼불』에서 콩 볶는 풍습을 마주하는 순간, 중학교 교실 풍경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지금의 학생들이라면 모닝 버거나 샌드위치, 삼각김밥을 나눠 먹었을 시간에, 우리는 양은도시락을 흔들어 볶은 콩 소리부터 들려주고 한 움큼씩 집어 먹었다.
40여 년 전의 그 풍경이 『혼불』의 문장과 겹쳤다.
나는 액을 막기 위해 콩을 볶았다는 믿음을 오래된 생활문화의 하나로 바라본다. 그러나 효원의 물음까지 옛 풍습 속에만 남겨둘 수는 없었다.
지금의 내 안에도 몰아내고 싶은 것과 꺼뜨리고 싶은 불이 있다.
마음먹는다고 단숨에 꺼지는 불도 아니다. 그 불길을 다스리느라 나 역시 몸살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다.
어쩌면 밖에서 오는 불보다 더 오래 사람을 태우는 것은, 안에서 꺼지지 않는 불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