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하는 풀, 익모초(益母草)
단오에 얽힌 특별한 기억은 많지 않다. 단옷날이면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는다고 배웠지만, 우리 집 주변에는 창포가 흔하지 않았고 그런 풍경을 본 적도 없다. 게다가 인삼비누와 우유비누, 다이알 비누를 거쳐 유니나 샴푸까지 나오던 시절이었으니, 머릿결을 좋게 하자고 굳이 창포를 삶는 수고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복을 입고 그네를 뛰는 날이라고도 했다. 명절이 아니어도 한복을 입을 수 있는 날이었다. 그런데 우리 동네에는 그네가 딱 하나뿐이었다. 동네 한가운데 솔숲에 매달린 그네였다. 자연히 솔숲 가까이에 사는 아이들 차지가 되곤 했다.
그네도 마음껏 타지 못하고, 이미 작아져 더는 입을 수 없게 된 한복이 아쉬우면 나는 장롱 문을 열었다. 고이 접힌 한복을 꺼내 이리저리 들춰보고 옷고름을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단오의 아쉬움을 달래곤 했다.
그 시절에는 단오나 칠석 같은 절기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요란한 행사는 아니어도 때가 되면 사람들이 모였고, 제철 음식과 술을 나누며 계절을 함께 건넜다.
동네 어르신들에게 단오도 그런 날이었다. 모내기를 마치고 한숨 돌리던 때라, 솔숲에 모여 막걸리를 나누고 지천으로 돋아난 쑥으로 떡을 만들어 작은 동네 잔치를 벌였던 기억이 있다.
『혼불』7권에서 단오 풍습을 읽다가 익모초 앞에서 눈길이 멎었다.
내게 익모초는 이름보다 몸서리로 먼저 남은 풀이다.
최명희 선생의 『혼불』은 일제강점기 전후 전북 남원의 한 종가를 중심으로 사람들의 삶과 풍속, 음식과 말, 계절의 살림을 촘촘하게 담아낸 대하예술소설이다. 나는 요즘 이 작품을 천천히 읽으며 그 안에 들어 있는 오래된 생활 풍경을 하나씩 들여다보고 있다.
『혼불』7권 196쪽에는 단옷날 아침 익모초를 뜯어 생즙을 내어 마시던 풍습이 나온다.
"단오날 정오에 캔 약쑥 익모초가 제일 좋지. 약효가 그만이라."
하며 들에 나가 어울려 캐 온 약쑥과 익모초를 헛간 옆구리 그늘에다 널어 말리던 어머니. 오류골댁 손과 저고리 배래 그리고 치마폭에서는 쌉싸하고 상긋한 풀내가 났다.
익모초(益母草).
암눈비앗(주 1).
이름 그대로 부인들, 특히나 산모와 어머니를 이롭게 하는 이 월년생초본(越年生草本) 두해살이 풀은 네모난 줄기와 부드러운 순, 꽃, 잎, 열매 모두 하나도 버릴 것 없이 약으로 쓰이었다.
그 생즙은 독하리만큼 썼다. 오죽해야 '익모초 쓴맛'이라 하리.
확독에다 시퍼렇게 찧어낸 익모초 생즙을 한 대접씩 벌컥벌컥 마시곤 하였다.
여름 더위를 이겨내고 몸을 다스리기 위해 그 지독한 쓴맛을 삼켰다는 대목을 읽는데, 오래전 내 입안에 남아 있던 맛이 먼저 되살아나 몸서리가 쳐졌다.
나는 익모초를 바카라에서 처음 알게 된 게 아니다.
이름보다 쓴맛을 먼저 알았고, 효능보다 몸서리를 먼저 배운 아이였다.
네 남매 가운데서도 유독 마르고 핼쑥한 아이였다. 얼굴에는 버짐이 오르기 일쑤였고, 더운 여름이 가까워질수록 입맛부터 잃었다. 햇빛이 쏟아지는 마당으로 나서다가 까무러졌던 기억도 있다. 갓난아기 때부터 잔병치레가 잦아 한 번은 너무 심하게 앓는 바람에 어머니가 아기를 잃는 줄 알고 오열하였다는 이야기도 훗날 들었다.
그런 나 때문에 어머니는 아무리 바빠도 화단 담벼락 아래 조붓한 자리에 익모초를 빼놓지 않고 심었다.
우리 집 익모초는 자줏빛 앙증맞은 꽃을 좀처럼 피우지 못했다. 꽃을 볼 만큼 자라기도 전에 줄기가 제법 굵어지고 잎이 우긋해지면 어머니의 작은 소쿠리가 먼저 다가왔다. 어머니는 생잎과 줄기를 한 움큼씩 뜯어 돌확에 넣고 절구공이로 짓찧었다.
절구공이가 내려앉을 때마다 초록 잎은 짓무르고 풋내와 쓴내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아직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그 냄새만 맡으면 벌써 마당 건너 대문 밖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짓이긴 익모초를 삼베포에 감싸 힘주어 짜면 천은 금세 진초록 쌉쏘롬한 쓴물이 배어들었다. 사발 안으로 뚝, 뚝 떨어지는 즙을 바라보고 있으면 목구멍부터 먼저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없어서 못 먹었지, 먹는 것이라면 웬만해서 마다하지 않던 아이였지만 익모초즙만큼은 달랐다. 먹지 않겠다고 손사래를 치고 입까지 틀어막아도 소용없었다. 결국 사탕 한 알을 손에 꼭 쥔 채 그 쓴물을 기어이 삼켜야 했다.
어린 마음에는 억울했다.
왜 이 쓴 것을 나만 먹어야 하지?
그런데 신통하게도 여름만 오면 달아나던 입맛이 익모초를 한동안 먹고 나면 서서히 돌아오곤 했다. 어머니는 아마 그 모습을 보며 다음 해에도 다시 익모초를 심었을 것이다.
초경을 치르고 몸이 한창 부대끼던 시절까지 어머니는 그 쓴 익모초 생즙을 기어이 먹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익모초가 내 몸을 추스르는 데 보탬이 되었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춘기를 지나며 몇 해 동안 해마다 십 센티미터 가까이 키가 훌쩍 자랐다. 그러는 사이 여름이면 입맛을 잃고 비실거리던 일도 서서히 사라졌다. 어린 날 평생 앓을 몫을 미리 치른 사람처럼, 그 뒤로는 큰 병치레 없이 지내왔다.
나는 시골에서 자라 야생풀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풀은 어린 내게 소꿉놀이 재료였고, 때로는 심심풀이 먹거리였으며, 몸을 꾸미는 재료가 되기도 하고 아픈 몸을 다스리는 약재가 되기도 했다. 머위꽃이 그랬고 아까시꽃과 괭이밥, 자리공이 그러했으며 꽈리와 까마중, 익모초도 그랬다.
『혼불』에서 만났던 익모초가 오래전 재미있게 읽었던 황대권 작가의 『야생초 편지』를 불러왔다.
그 바카라을 읽은 지 이십 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황대권 작가는 1985년 이른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오랜 옥살이를 했고, 훗날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야생초 편지』는 그 수감 생활 동안 교도소 안에서 야생초를 관찰하고 가꾸며 써 내려간 글을 묶은 바카라이다.
갇힌 공간에서 야생초를 들여다본다는 것은 단순히 풀 이름을 익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음대로 나갈 수도 없고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할 수도 없는 시간 속에서, 작은 풀 하나의 싹과 잎을 살피고 그것이 자라는 속도를 기다리는 일은 하루를 견디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억울함과 답답함을 당장 없앨 수는 없어도, 눈앞의 생명을 돌보는 동안만큼은 자신 안의 숨을 고를 수 있었을 테니까.
내가 그 바카라을 재미있게 읽었던 까닭은 낯선 풀을 새로 배우는 재미보다, 이미 알고 지내던 풀을 촘촘히 들여다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름은 실제로 나물로 무쳐 먹었고, 괭이밥은 고샅길가에서, 까마중은 늦가을 콩밭에서 반갑게 따먹던 풀이었다. 바카라 속 식용법과 야생초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내가 자란 마을의 들녘이 자연스럽게 포개졌다.
황대권 작가에게 야생초가 갇힌 공간에서 새롭게 발견한 생명의 동무였다면, 내게 풀은 애초부터 생활 한가운데 있던 것이었다. 먹고 놀고 꾸미고, 때로는 몸을 추스르는 데까지 쓰였다.
그중에서도 익모초는 유난히 오래, 쓴맛으로 남았다.
내가 자라 더 이상 익모초 생즙을 먹지 않게 되면서 화단 담벼락 아래에서도 그 풀은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잊고 지내던 익모초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언니가 결혼한 뒤였다.
어머니는 예전처럼 익모초를 심고 가꾸었다. 다만 이번에는 생즙을 내지 않았다. 익모초 줄기가 옹골차게 굵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줄기와 잎을 뜯어 가지런히 말려두었다.
그 쓰임은 세 딸이 차례로 아이를 낳으면서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딸들의 산바라지를 할 때마다 말려둔 익모초 줄기를 삶아 끓인 물을 산후 좌욕물에 섞어주셨다. 어린 딸의 입맛을 되찾아보겠다고 절구에 넣어 짓찧던 풀이, 어느새 어머니가 된 딸들의 몸을 돌보는 풀로 돌아와 있었다.
익모초는 우리 집에서 두 번 자랐다.
한 번은 약한 딸을 위해, 또 한 번은 어머니가 된 딸들을 위해.
생각해 보면 사람은 누구나 몸이 지치고 마음이 허한 때를 지나며 누군가의 손을 빌린다. 그 손이 어머니일 수도 있고, 할머니나 아버지일 수도 있으며, 말없이 곁을 지켜준 다른 누군가일 수도 있다. 곁에 있는 이의 몸이 기울 때 먼저 알아보고 무언가를 마련해 두는 마음은 어느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몸의 기운이 쇠하면 익모초 같은 것을 찾았듯 마음의 기운이 사위는 때가 있다. 그럴 때 저마다 제 기운을 북돋우는 것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오래 읽은 바카라일 수도 있고, 익숙한 노래 한 곡일 수도 있으며, 따끈한 뚝배기 안에 담긴 한 그릇일 수도 있고, 아무 말 없이 건네는 한 사람의 손일 수도 있다.
내게는 때때로 오래된 풀과 냄새, 나를 돌보던 손길을 다시 불러보는 일이 그런 보양거리가 된다.
삶이 건네는 쓴맛을 피할 수는 없어도, 그것을 견디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황대권 작가에게 야생초가 그러했듯, 어떤 것은 삶의 한복판에서 다시 기운을 내게 하는 작은 버팀이 되어준다.
그 시절 나는 사발 속 쓴물에 몸서리만 쳤다.
지금 돌아보면, 자줏빛 꽃 한 번 제대로 피워보지 못하고 잘려 나가던 우리 집 익모초가 이제야 다르게 보인다.
쓴 것은 익모초 생즙이었지만, 그 풀을 키운 손은 씨앗을 품는 자줏빛 꽃이었다.
주 1) 암눈비앗 - 익모초를 이르는 우리말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