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카지노 이웃 낮달 작가의 연재북『 아버지의 이름 』 에는 스무 살 남짓한 아들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마주했던 상례의 풍경이 펼쳐진다.
초혼(招魂)을 시작으로 상복을 입고 곡을 하고, 염습과 입관을 거쳐 상여가 나간다. 글을 따라가며 몇 번이나 놀랐다. 어린 시절 동네에서 보았던 상례의 풍경이 그 안에서 하나씩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상가에 모여 밤을 지새웠다. 초상 마당의 바지랑대에는 백열등을 연결해 달아 놓아 밤인데도 훤한 대낮 같았다. 집 안팎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곡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뒤섞였다. 지금 생각하면 참 왁자한 애도였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나 이청준의 『축제』에도 그런 상가의 풍경이 나온다. 밤이 깊도록 사람들이 모여 있고, 곡소리 사이로 말소리와 술잔이 오간다. 슬픈 자리인데도 적막하지만은 않은, 내가 기억하는 옛 장례와 닮은 모습이다.
한 사람이 멀리 떠난 날, 바람 찬 세상에서의 고단한 삶을 마치고 문을 닫는 순간을 사람들이 모여 함께 배웅하는 의식처럼 보였다. 슬픔만 있는 자리가 아니라, 한 생을 다 살아낸 사람에게 “애썼다”라고 말해주는 자리 같았다.
한 사람의 죽음을 가족 안에만 가두지 않고, 온 동네가 함께 밤을 밝히며 떠나보내던 시간이었다.
이제 그런 상례의 풍경은 생활에서 멀어졌다.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고 염습과 입관, 발인까지 일정한 절차에 따라 치르는 일이 익숙해졌다. 고인을 모시는 방식도 화장과 봉안, 자연장 등으로 다양해졌다. 상례에 쓰이던 옛 물건과 그 뜻은 생활보다 바카라 속에서 만날 때가 많아졌다.
『혼불』3권 청암부인 장례 장면을 읽다가, 상주가 짚는 지팡이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부모상을 당한 자식은 지팡이를 짚었다. 아버지를 잃었을 때와 어머니를 잃었을 때는 그 나무도 달랐다.
아버지상에는 대나무를, 어머니상에는 오동나무를 썼다.
부모상에 대나무와 오동나무 지팡이를 짚는 것은, 그 나무의 속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물론이고, 오동나무도 다 자라면 속이 메워지지만, 지팡이를 만들 만큼 어려서 아직 크기 전에는 비어 있다.(주 1)
혹 누구는 그것이,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에 너무나 노심 초사하여 속이 다 녹아 없어진 것을 슬퍼하며 기리어 짚는 것이라고도 하지만, 그보다는, 아무 사심 없이 자신을 모두 비워 내고 존재의 천연심(天然心)으로 돌아가, 우주 정기의 공간에서 부모와 자식이 아무 걸린 데 없이 서로 감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충정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을 상정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혼불』3권 198쪽 일부)
대나무와 오동나무는 모두 속이 비어 있다. 『혼불』은 그 빈 속에 자식을 기르며 제 것을 덜어낸 부모의 마음을 담는다. 동시에 부모를 떠나보내는 자식도 사사로운 마음을 비워, 부모와 자식 사이에 막힘 없이 감응하기를 바라는 뜻으로 풀어낸다.
나무의 마디도 서로 다르다.
대나무는 겉으로 마디가 또렷하다. 마디와 마디가 끊어진 듯 이어지고 그 흔적이 선명하다. 『혼불』은 그 생김새를 아버지를 여읜 자식의 슬픔과 이어놓는다. 사철 푸른빛을 잃지 않는 대나무에는 추모하는 마음 또한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오동나무는 겉으로 매끈해 마디가 없는 듯하지만 속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마디가 이어져 있다.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품는 마음, 겉에서는 알 수 없어도 속에서 이어지는 정서를 떠올리게 한다.
대나무는 마디를 밖으로 드러내고, 오동나무는 안으로 품는다.
그렇다면 부모상을 당한 자식에게 왜 지팡이를 쥐여주었을까.
큰 슬픔은 마음에만 머물지 않는다. 기운을 꺾고 몸까지 흔든다. 서고 걷는 일마저 힘겨운 상주에게 지팡이는 실제로 몸을 받쳐주는 물건이었다. 동시에 정해진 예법을 따라 상을 치르는 동안 자신을 붙들어주는 의물이기도 했다.
부모는 나보다 먼저 존재했고,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까지 기억해 주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사라지면 가족 한 사람의 자리가 비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오래된 한 축이 빠져나간다.
그때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슬픔을 덜어낼 수는 없어도 흔들리는 몸은 받쳐줄 수 있었다. 대나무와 오동나무의 빈 속에는 그렇게 부모와 자식 사이를 잇는 뜻이 들어 있었다.
대나무 지팡이는 끝을 둥글게, 오동나무 지팡이는 네모나게 다듬었다.
대나무와 오동나무의 모양을 따라가다 예전에 고택의 우물 앞에서 들었던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옛사람들의 세계관이다. 그때는 우물과 건축에서 만났던 천지의 질서가 사람을 보내는 상례에도 스며 있었다.
옛사람들은 슬픔에도 모양을 만들었다.
상복을 입고, 곡을 하고, 지팡이를 짚고, 상여를 메었다. 마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것을 몸과 절차가 함께 견뎠다.
그 지팡이에서 박완서 선생의 「엄마의 말뚝 3」으로 생각이 이어졌다.
『혼불』의 지팡이가 부모를 잃은 자식이 손에 쥐는 것이라면, 「엄마의 말뚝」의 말뚝은 어머니가 자신의 삶과 가족 안에 깊이 박아놓은 흔적에 가깝다.
「엄마의 말뚝」의 어머니는 자식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삶의 터전을 만들고,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전쟁과 가난을 지나며 자신의 생을 버틴다. 연작의 마지막인 「엄마의 말뚝 3」에서는 그 어머니의 죽음을 맞는다.
평생 자식을 밀어 올리며 살았던 어머니의 의지와 전쟁이 남긴 상처, 쉽게 풀리지 않는 삶의 매듭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없어지지 않는다. 딸의 기억 속에 남아 어머니라는 한 사람의 생을 붙들고 있다. 말뚝이라는 제목이 품은 무게도 그 자리에 있다.
『혼불』의 지팡이는 남은 사람이 손에 쥐는 것이고, 박완서 선생의 말뚝은 떠난 사람이 남은 사람 안에 박아놓은 것이다.
하나는 몸을 기대어 서게 하고, 하나는 세월이 흘러도 쉽게 뽑히지 않는다.
쓰임도 모양도 다른 두 물건 끝에는 남겨진 사람의 시간이 놓여 있다.
바지랑대에 백열등을 밝혀놓았던 초상 마당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밤을 지새웠다. 곡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때가 되면 상여를 메고 길을 나섰다.
그 모든 절차는 죽은 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슬픔으로 몸을 가누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기대어 설 지팡이가 필요했다. 혼자 견디기 벅찬 밤에는 함께 자리를 지켜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곡을 하고 상복을 입고 상여를 메는 일은 마음속에 갇힌 슬픔을 몸 밖으로 꺼내는 방식이기도 했다.
지금은 대나무나 오동나무 지팡이를 짚지 않는다. 상복과 상여도 예전의 모습과는 달라졌다.
그래도 사람을 떠나보낸 뒤 무엇엔가 기대어 하루를 이어가는 일은 남아 있다.
누군가는 고인이 쓰던 물건을 만지고, 누군가는 사진을 꺼내본다. 함께 듣던 노래를 다시 듣거나 오래된 습관을 그대로 이어가는 사람도 있다. 기억 역시 한동안 몸을 받치는 지팡이가 된다.
상례는 죽은 이를 보내는 절차인 동시에, 남은 사람이 상실을 견디며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방식이었다.
한때는 손에 지팡이를 쥐었다.
지금의 우리는 저마다 다른 것을 짚으며 다시 선다. 누군가는 기억을 짚고, 누군가는 남겨진 물건을 짚고, 누군가는 함께 살던 날들의 습관을 짚는다.
그렇게 사람은 떠난 자리 곁에서 제 방식의 지팡이를 하나씩 만들어간다.
주 1)
여기서 말하는 “속이 비었다”는 표현은 나무 가운데가 완전히 뚫린 파이프 형태라는 뜻보다는, 목재 조직 사이에 큰 공간이 형성된 구조를 가리킨다.
시리즈를 이 글로 마칩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 때 다시 이어보겠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이야기들 함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가을날 푹 빠져드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