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을 넘긴 깊은 밤에 갓난 아기 울음소리가 며칠째 들려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 가볍게 인사를 나누던 임신부가 있었는데, 어느새 아기를 낳았나 보다. 울음은 가냘프면서도 비슷한 시간에 들려왔다. 밤잠을 방해한다는 생각보다, 이 건물 어딘가에서 또 하나의 여린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오히려 반가웠다.
아기가 운다는 것은 가장 먼저 세상에 보내는 생존의 신호일 것이다. 배가 고프다고, 불편하다고, 자신이 여기 있다고 온몸으로 알리는 소리.
그 울음을 듣고 있자니 『혼불』 10권 82쪽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혼불을 엿보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혼불』 4권의 부서방을 만난 적이 있다. 청암부인의 곡간에 곡식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도둑으로 내몰리는 대신 쌀 한 가마를 얻어 들고 나왔던 사람이다.
그 쌀 한 가마는 부서방 가족의 배를 한동안 채우고 사라질 양식이 아니었다. 부서방은 그것을 종자 삼아 만주로 떠난다. 그곳에는 고리배미 사람 양판식이 먼저 가 있었다. 가진 것 없는 부서방에게는 낯선 땅에 아는 사람 하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길을 나설 이유가 되었다.
부서방네는 정월에 막 설을 쇠고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길을 나선다. 한겨울이었다. 어렵게 마련한 종자돈을 지키려고 차비까지 아끼며 식구들이 먼 길을 걸었다. 오는 길에 아이 하나는 동상으로 귀가 떨어져 나갔는데, 언제 잃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간 양판식의 형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만척(주1)의 이주정바카라 아래 척박한 정착지에서 궁핍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고, 결국 길 위에서 만삭의 아내와 어린 자식을 잃는다. 그때 부서방은 제 식구를 살리겠다며 그토록 아껴온 종자돈을 풀어 죽은 아이에게 입힐 옷을 마련한다.
『혼불』 10권 82쪽에서 부서방네는 길 위에 있다.
낯선 만주 땅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하던 부서방네는 지게를 진 노인에게서 봉천으로 가면 살 길이 열릴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그 말을 희망 삼아 노인을 따라 봉천으로 향한다.
그 길에서 부서방 아낙의 등에 업힌 아이가 칭얼거린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아이가 내는 희미한 소리였다. 그런데 아낙의 얼굴에는 오히려 안도하는 기색이 비친다. 그 칭얼거림이 아직 아이가 살아 있다는 표시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부서방네가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면 그 안도가 예사롭게 읽히지 않는다. 이미 아이의 귀 하나를 추위에 잃었고, 양판식의 아내와 어린 자식이 길 위에서 죽는 것까지 보았다. 이제 등에 업힌 아이의 칭얼거림은 단순한 보챔이 아니었다.
더구나 저 앞에는 봉천이 있었다. 그곳에 닿으면 어떻게든 살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남아 있었다. 희망마저 없었다면 배고픈 아이의 칭얼거림은 고통의 소리로만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갈 곳이 있다고 믿는 어미에게 그 소리는 달랐다. 이 아이가 아직 살아 있다. 조금 더 데리고 갈 수 있다. 어쩌면 살릴 수 있다.
울음이 반가울 수도 있구나.
그 대목에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떠올랐다.
김 첨지의 집에는 굶주린 아이와 병든 아내가 있다. 제대로 먹지 못한 어미에게 젖이 충분할 리 없고, 아이는 배가 고파 운다. 김 첨지도 얼마나 굶었는지 모를 빈속으로 비를 맞으며 인력거를 끈다. 그날따라 손님은 잘 잡히고 돈도 평소보다 많이 벌지만, 집 안의 가난은 그보다 먼저 아내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었다.
아내가 먹고 싶어 했던 설렁탕을 김첨지가 사 들고 돌아왔을 때, 그날의 ‘운수 좋음’은 너무 늦게 도착한 희망이 되어버린다.
『혼불』의 아이도 울고, 「운수 좋은 날」의 아이도 운다.
하지만 두 울음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부서방 아낙에게 아이의 칭얼거림은 아직 살아 있다는 표시였다. 봉천이라는 다음이 있었고, 거기까지 닿으면 혹시 살 길이 열릴지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추위와 허기에 찌든 아이의 작은 소리마저 안도의 이유가 된다.
반면 「운수 좋은 날」의 아이 울음은 가난의 출구가 보이지 않는 집 안에서 울린다. 아이는 배가 고파 울고, 병든 어미는 아이를 먹일 힘조차 없다. 김 첨지가 바깥에서 돈을 벌고 있는 동안에도 그 울음이 들리는 집 안에서는 생명이 조금씩 꺼져간다.
하나는 살아 있다는 표시로 들리고, 하나는 살아내기가 얼마나 힘겨운지를 들려준다.
생각해보면 이들의 삶에는 모두 길이 놓여 있었다.
양판식은 길 위에서 가족을 잃었고, 부서방은 살 길을 찾아 봉천으로 향했으며, 김 첨지는 굶주린 식구를 먹이기 위해 빗속의 길을 달렸다. 누구에게도 그 길은 여행이 아니었다. 살아내기 위해 건너야 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마다 아이의 울음이 놓여 있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울음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존재가 자신을 살려달라고 세상에 보내는 첫 신호가 울음이다. 누군가 그 소리를 듣고 다가와 품에 안고, 먹이고, 추위를 막아주면서 한 생명은 다음 순간으로 건너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내 안의 신호를 누군가 알아봐 주기를 기다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는 울음으로 그것을 드러내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그 소리를 여러 겹의 말과 표정 뒤에 감춘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누군가 알아봐 주기를 바라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하루를 건너면서도 제 안에서는 작은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을 때가 있다.
그래서 울음은 약함의 증거라기보다 아직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표시처럼 느껴진다. 소리를 낸다는 것은 아직 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뜻이고,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란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신호는 보내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누군가 그것을 알아듣고 다가올 때 비로소 구조의 가능성이 생긴다. 아이의 울음이 배고픔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그 소리를 듣고 품에 안는 손이 있어야 하고, 추위를 막아주는 몸이 있어야 한다. 어른의 신호는 더 희미해서, 때로는 말보다 침묵을 듣고 웃음 뒤의 표정을 살펴야 할지도 모른다. 살아간다는 것은 내 안의 신호를 세상에 보내는 일이면서, 동시에 곁에서 들려오는 작은 신호를 놓치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절박한 자리에서 희망은 거창한 모습으로 오지 않는지도 모른다. 등에 업힌 아이의 칭얼거림 하나, 집에 돌아가 먹이고 싶은 설렁탕 한 그릇, 저기까지 가면 살 수 있으리라는 말 한마디. 누군가에게는 너무 작아 보이는 것들이 막다른 곳에 선 사람에게는 다음 발을 내딛게 하는 전부가 되기도 한다.
『혼불』 10권 82쪽에서 나는 아이의 칭얼거림에 귀를 기울였다.
울음은 보통 달래어 멎게 해야 하는 소리다. 그런데 어떤 순간에는 그 소리가 멎는 일이 더 두렵다. 배고파서 울고, 추워서 울고, 살려달라고 우는 동안에는 아직 생명이 제 안에서 버티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운수 좋은 날」의 아이도, 부서방 아낙 등에 업힌 아이도 세상을 향해 그렇게 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나의 울음은 절망을 더 짙게 하고, 다른 하나의 울음은 희망의 기척이 된다. 그러나 두 소리 모두 결국 같은 곳에서 시작된다.
살고 싶다는 것.
살아 있어 달라는 것.
어쩌면 가장 절박한 자리에서조차 끝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바로 그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주1) ※ 만척(남만주철도주식회사)은 일제가 만주 지배와 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철도·토지·농업·이주 정바카라 등에 깊이 관여한 핵심 기관이었다. 조선인 농민의 만주 이주와 정착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새로운 땅에서의 생계와 개척’을 기대하고 떠난 이주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실제로 척박한 토지와 혹독한 기후, 빈곤한 생활 여건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