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동네 공원 입구 카페에 앉아 있다가 통유리창 너머로 흐드러진 꽃무릇을 보았다.
꽃무릇은 가을에 먼저 꽃대를 올려 붉은 꽃을 피운다. 꽃이 지고 나서야 푸른 잎이 돋아나 겨울을 견디고, 이듬해 봄이면 그 잎마저 스러진다. 여름이 오면 땅 위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여름은 생장의 계절이라 주변의 모든 잎이 저마다 푸르름을 자랑하는 때다. 그런데 꽃무릇만은 그렇게 한철 자취를 감추었다가, 서늘한 바람이 들 무렵 다시 맨몸의 꽃대를 밀어 올린다.
창밖의 꽃무릇을 보고 있자니, 저 붉은 꽃 아래 감춰져 있던 계절들이 떠올랐다. 눈앞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듯했던 여름에도 땅속의 비늘줄기는 제 시간을 지나고 있었을 것이다.
보이는 것은 늘 나중이다. 꽃도 그렇고, 사람의 변화도 그렇고, 한 문장의 결실도 그렇다. 먼저 있었던 것은 대개 눈에 띄지 않는 시간이다.
그 생각을 품은 채 『혼불』 10권 38쪽을 읽다가 연필을 들었다. 밑줄을 긋고, 다시 찾으려고 귀퉁이에 표시용 딱지를 붙였다.
강태와 강모의 스승인 심진학은 전주고보에서 역사를 가르치다가 만주로 이민 온 사람이다. 심진학은 그 두 사람에게 옛 제자 지용훈이 했던 말을 들려준다.
꿈을 가진 사람은 훗날을 위해 씨앗을 미리 묻어두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꽃이 필요해진 다음 꽃씨를 뿌리면 늦다. 그러니 당장 무엇이 될지 알 수 없어도, 마치 버리듯 땅속에 씨앗을 묻어두어야 한다.
모든 씨앗이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벌레가 먹을 수도 있고, 종자가 부실할 수도 있다. 너무 일찍 혹은 늦게 뿌려 때를 놓칠 수도 있고, 제 몸에 맞지 않는 땅에 떨어져 썩어버릴 수도 있다. 그래도 그중 한 톨이 제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필요한 때 쓰일 수 있다면, 먼저 사라진 씨앗들까지 모두 헛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이 대목을 읽으니 아주 오래전 동화바카라에서 만났던 완두콩들이 생각났다. 안데르센의 「다섯 알의 완두콩」이다.
한 꼬투리 안에 나란히 들어 있던 완두콩 다섯 알은 어느 날 세상 밖으로 튕겨 나간다. 같은 꼬투리에서 자랐지만 도착한 곳은 모두 달랐다. 어떤 콩은 먹히고, 어떤 콩은 엉뚱한 곳으로 굴러간다. 그중 한 알은 가난한 집 창가의 틈에 박힌다.
그 집에는 병약한 소녀가 있었다. 틈에 떨어진 작은 완두콩은 어느 날 싹을 내고, 줄기를 뻗고, 마침내 꽃을 피운다. 창밖의 작은 생명이 하루하루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소녀도 조금씩 생기를 되찾는다.
어릴 때 그 동화를 읽으며 나는 소녀가 다시 기운을 얻는 장면에 안도하고 바카라장을 덮었다. 그런데 『혼불』의 씨앗 이야기를 읽고 나니 이번에는 완두콩들의 처지가 먼저 보였다.
같은 꼬투리에서 나온 씨앗인데도 어디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산다. 어떤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어떤 하나는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창가에서 꽃을 피운다. 씨앗은 자신이 어디로 날아갈지 선택하지 못했을 텐데, 그중 한 알이 누군가에게는 살아볼 마음을 건넨다.
이어서 성경 속 씨앗도 따라왔다.
마태복음 13장 3~9절에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온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밭에 씨앗을 뿌린다. 어떤 씨앗은 길가에 떨어져 새에게 먹히고, 어떤 씨앗은 돌밭에 떨어져 금세 싹을 틔우지만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한다. 어떤 것은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져 자라다가 막히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혼불』의 지용훈이 말한 씨앗과 성경의 씨앗 비유, 그리고 어릴 적 읽었던 다섯 알의 완두콩이 한꺼번에 겹쳐졌다.
씨앗은 모두 같은 결말을 약속받지 않는다. 좋은 씨앗이라고 반드시 꽃피는 것도 아니고, 심는 사람이 정성을 다했다고 반드시 열매를 보는 것도 아니다. 어느 땅에 떨어지는지, 무엇을 만나고 어떤 시간을 지나느냐에 따라 운명은 달라진다.
그렇다면 사람은 결과를 얼마나 알고 씨를 뿌리는 걸까. 아마 거의 모를 것이다.
내가 건넨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오래 남을지, 아무렇지 않게 사라질지 알 수 없다. 정성 들여 가르친 아이가 훗날 무엇을 품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내가 써놓은 문장 하나가 누구에게 가닿을지, 혹은 댓글 몇 줄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질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씨앗을 심는다. 꽃이 필요한 날에야 부랴부랴 꽃씨를 찾을 수는 없으니까.
이런저런 생각 끝에서 요한복음 12장 24절의 한 알의 밀알까지 갔다.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그대로 한 알로 남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신다.
씨앗은 땅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눈앞에서 사라진다. 어제까지 손바닥 위에 있던 것이 흙에 덮인다. 그것만 보면 잃어버린 것 같다.
그런데 싹이 트려면 씨앗은 원래의 모양을 그대로 지킬 수 없다. 단단한 껍질이 갈라지고, 한 알이었던 모습은 무너진다. 그 자리에서 뿌리는 아래로 뻗고, 정반대 방향으로 줄기는 위를 향한다.
씨앗이라는 존재는 그래서 묘하다. 붙들고 있으면 한 알 그대로 남지만, 땅에 놓으면 자신이던 모습을 잃고 더 많은 생명으로 이어진다. 잃어야 남게 되는 것이다.
결국 씨앗을 심는다는 것은 결과를 소유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심었으니 내가 꽃을 보고, 내가 물을 주었으니 내가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씨앗은 계산이 된다. 하지만 심은 사람과 꽃을 보는 사람이 다를 수도 있고, 꽃을 본 사람과 열매를 거두는 사람이 또 다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내가 거두지 못한 씨앗은 실패한 것일까.
『혼불』 10권 37쪽의 밑줄을 다시 본다.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때로는 씨앗을 버리듯 묻어둘 줄 알아야 한다는 말.
나는 ‘버리듯’이라는 말이 좋다.
아무렇게나 버린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결과를 움켜쥐지 않고, 내 눈앞에서 반드시 꽃피어야 한다는 욕심까지 함께 놓아주는 데 더 가까울 것이다.
그러다 문득, 지금 키우고 있는 씨앗 하나가 떠올랐다.
몇 해 전 애플망고를 먹고 남은 씨앗 하나를 버리지 않았다. 딱딱한 겉껍질을 조심스레 벗겨내고, 속씨를 축축한 키친타월에 감싸 밀폐통에 넣어 두었다. 열흘쯤 지나자 아주 작은 싹이 나왔다. 신기해서 화분에 옮겨 심었고, 지금도 그 나무를 키우고 있다.
애플망고는 생각보다 더디게 자랐다. 잎 한 번 내고 일 년 가까이 생장이 멈춘 듯 숨을 고르기도 했다. 언제 꽃이 필지, 우리 집 화분에서도 과연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물을 주고, 누렇게 변한 잎은 떼어내고, 새 잎 하나가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내가 하는 일은 그것뿐이다. 잘 자라라고 물을 주고, 시든 잎을 걷어내고, 다음 잎을 기다리는 일. 무엇이 될지 다 알지 못한 채 돌보는 일.
내가 심은 것을 반드시 내가 거두지 못하더라도, 그 씨앗이 제 자리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나는 이 나이가 되기까지 누군가가 오래전에 버리듯 묻어둔 씨앗의 열매 덕으로 살아왔다. 내가 알지 못하는 손이 심은 것, 얼굴도 모르는 이가 남겨둔 것, 때로는 가까운 사람이 아무 대가 없이 건네준 것들이 지금의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을 것이다.
그러니 나 역시 누군가를 위해 씨앗 몇 알쯤 묻어둘 이유는 충분하다. 내가 꽃을 보지 못해도, 열매를 거두지 못해도 괜찮다. 언젠가 누군가의 계절에 그 씨앗 하나가 제때 싹을 틔울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