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화병이 데려 온 방망이 노인

by라이테

나무화병 하나에서 눈이 멈췄다.


그 화병이 등장하기 전에는 꽤 험한 일이 벌어진다. 매안 이씨 종가의 큰어른이었던 청암부인의 묘소가 훼손되고, 선산지기는 그날 산에서 내려오는 춘복을 보았다고 말한다. 그 말 한마디로 춘복은 첫 번째 용의자가 되어 종가로 끌려가 덕석말이를 당한다. 몇 시간 뒤 실제로 투장을 하려고 묘소를 손댄 당골네 부부의 일이 밝혀지고, 두 사람 역시 끌려와 죽도록 매를 맞는다.

최명희 선생 장편소설 『혼불』 8권
마침 그날 일본 유학 중 고향에 돌아온 강호가 이 일을 마주한다. 강호 역시 이 일을 벌인 매안 이씨 집안 사람이다. 양반과 천민을 나누는 오래된 질서에 염증을 느끼던 그는 상처 입은 춘복과 당골네 부부에게 약값을 내놓는다.

당골네 부부를 간호하던 백정 택주는 그 모습을 지켜본다. 강호와 택주, 매안과 거멍굴 사이에는 다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다리 하나면 닿는 거리였지만 강호가 스물몇 해를 살아오는 동안 두 사람은 한 번도 서로의 눈을 보고 말을 건넨 적이 없었다. 택주는 피붙이 하나 없는 춘복을 살핀 강호가 고마웠고, 그 고마움에 대한 답례로 나무화병 하나를 내어준다.

그런데 그 화병 역시 택주의 손에 그냥 들어온 물건이 아니었다. 고리배미의 나무 깎는 목수가 명절이나 제사 때 택주에게서 고기를 가져다 쓰고도 값을 갚지 못하자 미안한 마음에 대신 건넨 것이었다. 택주는 귀한 물건인 줄은 알았지만 마땅히 쓸 데가 없어 시렁 위에 올려두고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강호에게 고마움을 갚을 일이 생기자 그 화병을 꺼내 내민다.

한 번은 갚지 못한 고기값 대신, 또 한 번은 고마움의 답례로. 나무화병은 그렇게 두 번 사람 사이를 건넜다.


『혼불』 8권 23장의 소제목은 「시궁이 비취로」다. 강호가 받아든 화병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읽으면 그 제목이 예사롭지 않다. 목수는 생나무 둥치를 토막 내 시궁창에 처박아 무려 ‘석삼년’을 삭힌다. 똥과 오줌, 온갖 생활하수와 잡동사니가 흘러드는 더러운 도랑이다. 나무는 그 속에서 삼 년을 보낸다. 열에 아홉은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썩어 없어지고, 끝내 골격을 잃지 않은 나무만 건져낸다.

장인이 나무화병 원재료를 단련하는 대목

그걸로 끝도 아니다. 시궁에서 건져낸 나무를 다시 흐르는 냇물에 오래 담가 시궁물과 냄새를 씻어낸다. 햇볕에 바짝 말리는 대신 처마 밑 그늘에서 천천히 말린다. 그렇게 또 시간을 들인 뒤에야 목수가 비로소 칼을 댄다.


이쯤에서 바카라장을 넘기던 손이 잠시 멎었다.


아니, 화병 하나를 만들려고 생나무를 똥오줌 섞인 시궁창에 삼 년이나 처박아둔다니.


더 기묘한 것은 그 시간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씻어내도 시궁에서 보낸 흔적은 나무에 남고, 그것이 훗날 아련한 비췻빛 무늬가 된다.


화병 하나가 오래 묵은 기억을 끌어냈다. 나무를 베었다고 곧장 쓰지 않고 오래 다루고 기다린다는 점에서는 팔만대장경판도 잠시 스쳤다. 그러나 더 선명하게 돌아온 것은 아주 오래전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읽었던 윤오영의 「방망이 깎던 노인」이었다.


그때는 그 수필이 품은 깊은 뜻까지 헤아리지는 못했다. 어린 눈에는 손님이 기다리는데도 방망이를 깎고 또 깎는 노인이 답답하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이만하면 됐지, 왜 저렇게 오래 깎고 있나.’ 아마 그런 쪽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글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특히 한 장면이 그랬다. 방망이를 깎던 노인이 잠시 손을 멈추고 동대문 지붕과 추녀 쪽을 바라보던 모습이었다. 손님은 차 시간이 급하다. 노인은 급하지 않다. 깎고, 살펴보고, 다시 손을 댄다. 그러다 잠깐 일을 멈추고 동대문 쪽을 바라본다. 내 기억 속 노인은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다. 손님이 재촉하든 말든 덜 된 것은 덜 된 것이었다.


노인과 손님은 처음부터 돈으로 만난 사이다. 한 사람은 물건을 만들고, 한 사람은 값을 치른다. 그러나 손님은 방망이 값을 지불했지만 노인의 손놀림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노인에게는 노인의 기준이 있었다.


『혼불』의 택주와 강호는 전혀 다른 자리에서 만난다. 두 사람은 한 마당에 마주 설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매안과 거멍굴은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었지만, 신분은 그보다 훨씬 먼 거리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그 거리를 먼저 건넌 것은 강호였다. 자기 집안에서 매를 맞은 이들에게 약값을 내어놓았다.


“거저 생긴 돈도 아니고 부모한테 탄 것도 아니야. 내가 낯선 땅 남의 나라에서 인력거 끌고 빈 병 팔아 고학하며 아깝게 모은 학비야. 내가 왜 이런 말까지 다 하는고 하니, 우리가 서로 나눠 씀직한 돈이란 말을 하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 다른 데 쓰지 말고 꼭 약을 지어 먹어.”
(중략)
“서방님, 지가 텍이 덜덜덜 떨려서 무신 말씸이 잘 안 나오네요......지 속은요, 기양 딴거이 아니고, 시방, 지가 갖꼬 있능 것 중에, 기중 지일 낫은 거, 요거 하나 있길래 들고 나왔그만요. 우습지마는.”
강호의 말 / 택주의 말

그러자 택주도 강호에게 자신이 가진 것 가운데 가장 나은 것을 내민다. 택주가 내민 것은 나무화병이었다.


이 문장을 읽다가 주바카라맞게 눈물이 삐질삐질 났다. 택주가 황급히 쥐고 나온 나무화병을 어쩔 줄 몰라 하며 건네는 손이 눈앞에 보이는 듯해 가슴이 쓰라렸다.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은 돈도, 물건도 아니었다.

그 뒤에 조용히 남아 있던 사람의 인정(人情)이었다.

신분을 가르기 전에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마음.


「방망이 깎던 노인」의 화자는 세간난 뒤 아내가 쓸 다듬이방망이를 마련한다. 이제 막 꾸려가는 살림으로 가져갈 물건이었다. 『혼불』의 나무화병은 고마움의 답례다.


방망이는 아내가 직접 써본 뒤에야 노인의 솜씨가 드러난다. 손님 눈에는 진작 다 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 써보니 노인이 왜 그토록 오래 깎았는지를 알게 된다. 나무화병은 사연을 알고 난 뒤 무늬가 달리 보인다. 그 비췻빛이 시궁에서 삼 년을 삭고, 흐르는 물에 씻기고, 그늘에서 천천히 마른 나무의 흔적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말이다.

AI 합성이미지


그러다 문득 두 작품이 놓인 시간을 한번 가늠해 보고 싶어졌다.


「방망이 깎던 노인」은 1974년에 발표된 수필이지만 글 속 화자가 돌아보는 일은 그보다 사십 년 전이다. 그렇다면 대략 1930년대 무렵이다. 『혼불』의 사람들도 비슷한 시기의 일제강점기를 살아간다.


뜻밖에도 두 작품의 시간이 겹친다.


정확히 같은 해였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같은 시대 어디쯤에서 한 노인은 나무를 깎고 있었고 또 어느 곳에서는 생나무가 시궁 속에서 삼 년의 시간을 지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서로 아무 관계도 없는 두 작품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흐른 뒤 하나는 중학생이던 내 교과서 속에서, 다른 하나는 『혼불』 8권에서 다시 만났다. 그때는 깊이 읽지 못했던 「방망이 깎던 노인」인데도, 방망이를 깎다 손을 멈추고 동대문 지붕과 추녀 쪽을 바라보던 노인의 무심한 얼굴은 오래 기억하고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나 『혼불』의 나무화병을 읽다가 그 노인을 다시 만났다.


한쪽에서는 손이 시간을 들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무가 시간을 견뎠다. 방망이에는 노인의 손길이, 화병에는 시궁을 지나온 흔적이 남았다.

그러고 보니 낮달 작가님이 인용하시던 문장이 떠올랐다.


“손이 고생해야 맛이 난다.”


좋은 물건도, 깊은 맛도, 심연에 닿는 문장도 어쩌면 흠 없이 매끈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래 들인 손과 견뎌낸 시간이 지워지지 않은 데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도 그와 비슷해서, 오래 지나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무엇을 주고받았는가보다 그때 서로를 어떻게 대했는가 하는 흔적일지도 모른다.


먼 훗날 어느 날에는, 방망이를 깎다 문득 고개를 든 노인의 무심한 옆얼굴과 투박한 백정의 손에서 유학생 청년의 손으로 건너가던 나무화병이 아무 까닭도 없이 한꺼번에 떠오를 것 같다.




덧)

『혼불』을 읽은 뒤에도 가끔 불쑥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큰 사건도 아니고, 줄거리의 중심도 아닌데 이상하게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순간들.

바카라의 순서와는 상관없이,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꺼내보려 합니다.

그것은 사람일 수도, 물건일 수도, 말 한마디나 오래된 풍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저 눈에 걸렸던 것들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는

『혼불』을 엿봅니다.

이 카지노 게임에 시리즈 형식으로 부제를 붙여서 글을 올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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