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겨울 진영 단감을 먹고 남은 감씨 여남은 알을 빈 화분에 콕콕 눌러 심었다. 그러고는 잊고 지냈다.
어느 날 아침, 씨껍질을 머리에 인 작은 싹 두 줄기가 괭이밥 사이로 올라와 있었다. 기를 쓰며 버티는 모습이 기특해 물을 거르지 않았다. 싹이 제법 자라자 화분을 시골집으로 가져가 마당에 옮겨 심기로 했다.
마침 돌미나리가 한창이라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감싹이 든 화분을 차에 실었다. 물길을 따라 난 정미소 앞 오솔한 길로 접어드니 길가에 보랏빛 등나무꽃이 흐드러져 있었다.
메마른 날들 속에서도 꽃은 제때를 알아 벙글었다. 등나무꽃을 바라보다 문득 아까시꽃이 벙글던 고향 언덕이 떠올랐다.
어릴 적 찔레꽃이 피던 언덕에는 구기자나무와 골담초, 개나리 사이로 아까시나무가 푸릿푸릿 자라 있었다. 꽃이 벙글면 마을 어귀까지 달큰한 향기가 번졌고, 코끝을 스치면 마음부터 울멍거렸다.
우리는 아까시나무 잎자루를 따서 가위바위보를 하며 한 잎씩 떼어 내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꽃을 따느라 나무 아래가 시끌벅적했다. 까치발을 해도 닿지 않는 높은 가지에는 탐스러운 꽃송이가 매달려 있었다. 줄기에는 가시가 있는 데다 손에도 닿지 않아 결국 친구의 등을 밟고 올라서야 했다.
위태롭게 서서 낭창낭창한 줄기를 힘껏 잡아당기면 가지가 쫘악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아래로 휘어졌다. 몇 번을 휘어내리고 나면 꽃놀이하기에 넉넉한 양이 모였다.
먼지가 얼마나 묻었는지는 대수롭지 않았다. 꽃자루를 엄지와 검지로 붙잡고 두어 번 허공에 털어 낸 뒤 송이 끝을 코앞까지 들어 올렸다. 눈을 지그시 감고 어깨가 쑥 올라가도록 숨을 들이쉬면 향기가 너울처럼 밀려왔다. 몸이 바르르 떨리고 입시울이 절로 기울었다.
이번에는 눈을 살며시 뜨고 초록빛을 한 줄 머금은 하얀 꽃을 바라보며 서서히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송이가 반쯤 들어가면 입술을 옹동그렸다. 꽃송이를 쥔 손에 힘을 조절해 밖으로 다시 잡아당겼다. 입안에서는 작은 꽃들이 향기롭게 터졌다. 살강살강 꽃잎을 짓이기는 잇새로 달큰한 물이 스며 나오면, 친구의 등 위에서 후들거리던 다리도 노곤하게 풀렸다.
그렇게 아까시꽃은 먼저 간식이 되었고, 남은 꽃은 소꿉놀이에 쓰였다.
꽃이 흐드러지면 집집마다 아까시꽃술을 담갔다. 대나무 소쿠리에 꽃이 수북이 쌓이면 광에서 커다란 유리병이 우물가로 나왔다. 머리에 수건을 쓴 어머니가 도르래로 샘물을 퍼 올려 대야를 채우면, 어린 우리도 덩달아 우물가에 나와 턱을 괴고 앉았다.
소쿠리의 꽃을 물이 가득 담긴 대야에 부어 먼지를 씻어 냈다. 꽃잎을 낱낱이 떼어 낼 겨를이 없으니 꽃자루째로 씻었다. 물 위에 둥둥 뜬 꽃을 우리는 양손으로 움켜쥐어 물속에 담갔다가 흔들어 건져 냈다.
물에 뜬 꽃이 손끝에 닿는 감촉도 좋았지만, 물을 튕겨 꽃잎을 대야 밖으로 날려 보내는 일이 더 재미있었다. 어머니는 꽃을 씻느라 바빴고, 딸들은 그 곁에서 키득거리며 장난을 쳤다.
물기가 빠진 꽃은 흰 설탕과 섞어 유리병에 차곡차곡 담았다. 투명한 술을 붓고 병을 살살 흔든 뒤 입구 가까이까지 채워 뚜껑을 단단히 닫았다. 유리병은 서늘한 광으로 들어가 여름 내내 잠을 잤다.
유리병 뚜껑이 열리는 날은 추수가 한창일 때였다. 어른들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이어진 탈곡으로 온몸에 티끌을 묻힌 채 돌아왔다. 밤이슬이 내리기 시작한 마당 귀퉁이에 앉아 아까시꽃술 병을 열었다. 잔에 담긴 꽃술이 목을 타고 넘어갈 때마다 긴 하루도 목울대를 따라 일렁였다.
때로는 ‘으악새’를 부르고, 때로는 ‘저 푸른 초원’을 흥얼거리다가 끝내는 젊어서 놀아야 한다는 가락까지 이어졌다. 한 번 열린 유리병은 몇 차례에 걸쳐 조금씩 비워졌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결국 시쁜 나무에 불 튀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나는 병 속에 오래 잠겨 있던 아까시꽃이 무슨 맛인지 궁금했다. 마침 집 안에는 언니와 나 둘뿐이었다. 우리는 광으로 숨어들었다.
단단히 닫힌 빨간 뚜껑을 언니가 얼굴이 벌게지도록 힘주어 열었다. 독한 술 냄새가 먼저 확 올라왔다. 곧이어 달고 향긋한 냄새가 뒤따랐다. 침침한 광 속에서 병 속의 꽃은 술을 잔뜩 머금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결국 손이 병 안으로 들어갔다. 한 송이를 집어 먹고 나니 어느새 또 한 송이를 쥐고 있었다. 독하면서도 달았다. 몇 번을 더 건져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우리는 유리병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아 있다가 서서히 몸이 기울었다.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었다. 술기운이 밴 숨이 눅눅한 광 안에 가득 찼다.
들녘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우리를 발견했다. 우리는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광을 나왔다.
마루 끝 백열등 아래에서 술기운에 벌게진 얼굴과 흐트러진 꼴이 낱낱이 드러났다. 언니와 나는 서로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아까시꽃이 흐드러지던 언덕은 이제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커다란 물류창고가 들어섰다. 땅은 오래 품고 있던 모양을 하나씩 지우며 다른 쓸모를 받아들였다.
시골집에 도착해 감싹을 마당 한쪽에 옮겨 심었다. 괭이밥 사이에서 기를 쓰던 두 줄기 싹을 흙에 묻고, 손바닥으로 주위를 가만가만 눌러 주었다.
덧)
살강살강-설익은 곡식이나 열매 따위가 자꾸 가볍게 씹히는 소리. 또는 그 느낌.
설미-일의 갈래가 구별되는 어름. 가늠, 갈피
시쁜 나무에 불 튀기 -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나무에 불이 붙어서 그 불꽃이 자기에게 튀어 해를 입힌다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