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사흘째 이어지던 저녁이었다. 밥상머리에서 어머니가 말했다.
“봄비는 쌀비여. 흠뻑 내려서 모내기가 딱 알맞당게.”
아버지도 한마디 거들었다.
“논에 물이 잘람잘람허니, 이대로 모가 뿌리만 잘 내리면 걱정 없겄구만.”
쌀비가 흠뻑 내리자 버석버석 말라 가던 흙이 촉촉하게 젖고, 농수로에는 물이 콸콸 흘렀다. 비가 그친 뒤 논물에는 하늘이 얕게 고였고, 논둑의 풀잎마다 물기가 반짝였다. 말끔하게 갈아엎어진 황토밭 너머로 모내기를 앞둔 논마다 물이 가득 차 작은 호수처럼 보였다.
햇살이 정수리 위로 눈부시게 내리쬐면, 나는 손에 토끼풀꽃을 쥔 채 치맛자락을 팔랑거리며 앙감질로 논둑을 누비곤 했다. 논둑 너머로 마을의 흙길과 낮은 담장이 이어졌다.
우리 논 모내기 날을 잡아 놓은 어머니는 그날 아침 가장 먼저 이웃집 논으로 품앗이를 하러 나섰다. 다음은 자전거를 탄 아버지였고, 그 뒤로 오빠와 언니가 학교로 향했다. 집에는 동생과 나, 둘만 남았다.
마당에는 목줄 없이 키우던 암컷 개가 있었다. 이름은 메리. 키우던 개가 죽고 새 개를 들여도 우리 집 개 이름은 늘 메리였다.
개도 아이도 특별히 돌보아 주는 사람 없이 저마다 하루를 보냈다.
어른이 없는 집은 빈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집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 대문간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손에는 어머니가 새참으로 받아 온 건빵을 쥐고 있었다.
가위질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고물장수를 보면 헌 고무신이나 비료 포대도 모두 가져가는 줄 알았다. 그것들을 지켜야겠다는 어린 마음이 있었다. 열차가 지나가면 승객이 볼 수 없는 거리인데도 객쩍게 손을 흔들었고, 진동이 느껴지는 땅바닥에 부러진 나무젓가락으로 모양을 그렸다 지우기를 되풀이했다.
어머니는 아리잠직한 두 딸의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종일 뻘흙에 발을 푹푹 빠뜨리며 허리를 굽혔다 펴기를 되풀이했다.
담벼락에 그늘이 길게 드리워질 무렵이면, 메리는 내 손의 건빵 봉지가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얻어먹을 것이 마땅치 않으면 아까시꽃이나 감꽃, 덩클덩클 매달린 풋앵두와 보리수 열매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발랑발랑 꼬리를 흔들며 동네 마실을 나갔다. 때로는 도깨비바늘을 온몸에 잔뜩 묻혀 돌아왔다. 메리가 내 앞에서 몸을 빠들빠들 털어대면, 나는 머리에 알밤을 한 대 먹이고 슬리퍼를 벗어 가시를 떼어 주었다.
담벼락 그늘이 반으로 접힐 즈음, 나는 골목길가에서 질경이 꽃대를 한 줌 뜯어 왔다. 풀싸움 재료였다. 이제 건빵 봉지를 뜯을 시간이었다.
밥그릇 두 개에 물을 담고 오렌지 가루를 듬뿍 타서 툇마루에 앉았다. 이쯤 되면 메리가 올 법도 한데 살랑거리는 꼬리가 보이지 않았다.
동생과 나, 건빵 두 봉지. 질경이 꽃대를 엇갈리게 걸어 당기다가 꽃대가 끊어진 쪽이 건빵 한 개를 내놓기로 했다. 굵고 튼실한 꽃대는 내가 골라 쥐었으니 동생은 언제나 불리했다. 그래도 동생의 기분이 상하기 직전에는 멈춰야 했다.
풀싸움이 한창인데도 메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건빵이 몇 개 남지 않았을 때 메리가 집으로 돌아왔다.
뉘 집 부엌이나 헛간에라도 숨어들었나 보다. 몸에는 왕겨가 잔뜩 묻어 있었다.
“메리, 누구 집 갔다 왔어? 몸이 그게 뭐야?”
평소 같으면 긴 혀를 낼름거리고 꼬리를 있는 힘껏 흔들며 앞발을 쭉 뻗어 애교를 부렸을 텐데, 그날은 곧장 뒤안 남새밭으로 향했다. 건빵에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치다니 이상했다. 특별한 먹이라도 물고 있나 보다 싶었다.
“메리. 메리. 지금 안 오면 건빵 안 줄 거야.”
메리가 오는 기척은 없었다. 대신 뒤안에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건빵 봉지를 손에 움켜쥔 채 뒤안으로 갔다.
메리는 머윗잎이 무성한 흙담 아래에서 땅을 파고, 몸을 뒹굴며 켕켕거렸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덜컥 겁이 났다. 이상한 짓을 그만두게 하려고 싸리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그때 메리가 고개를 돌렸다.
입에서 하얀 거품이 쏟아졌고 눈은 흰자위로 뒤덮여 있었다. 메리는 자꾸 앞발로 땅을 팠다. 나는 메리를 뒤에서 두 팔로 끌어안고 잡아당겼다.
“메리, 왜 그래? 메리. 땅 파지 마. 왜 그래?”
평소 잘 따르던 메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싸리빗자루로 때릴 수도 없었다. 메리는 파낸 흙구덩이에 하얀 거품을 쏟고 다시 흙바닥을 뒹굴었다. 머위꽃이 송이째 굴러떨어지고 억센 잎이 찢어지면서 쌉싸름한 냄새가 퍼졌다.
도저히 내 힘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나는 동생에게 툇마루에서 내려오지 말라고 소리치고 대문을 향해 달렸다.
모내기하는 엄마를 불러오면 나도 메리도 함께 야단맞을 것 같았다. 학교에 있는 언니와 오빠라면 메리를 달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동네를 벗어나 뛰다 보니 언니와 오빠가 다니는 국민학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방소와 지서를 지나 이모네 가구점까지 가서 길을 물어야 했다.
눈물이 자꾸 났다. 메리가 괴로워하던 모습이 떠올라 숨이 차올라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길은 너무 멀었고 발걸음은 차츰 느려졌다.
이모는 가게 유리문 안에 보이지 않았다. 길 건너 안채에 있었을 텐데, 나는 헐헐거리며 가게 앞에 주저앉았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학교를 찾아 나선 것도 서러웠고, 집에 둔 동생과 메리도 걱정되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니 툇마루에는 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집 안은 조용했다.
뒤안 남새밭으로 가 보았다.
메리는 온몸에 왕겨와 흙을 묻힌 채 웅크리고 있었다. 바닥에 건빵이 나뒹굴고 있었는데도 입을 대지 않았다.
내 코에서 뜨끈한 것이 흘러내렸다.
나는 까치발로 엄마 화장대 서랍에서 약솜을 꺼냈다. 장롱에서는 메리에게 덮어 줄 보자기 한 장을 꺼냈다.
그 뒤로도 우리 집에는 몇 마리의 메리가 더 있었다. 새로 온 개들은 모두 같은 이름으로 불렸고, 어느 날엔가 또 같은 방식으로 사라졌다. 그때마다 나는 코피를 쏟았다.
그날 언니와 오빠가 아니라 엄마를 불러왔다면 달라졌을까. 이미 늦었다는 것을, 그때 우리에게는 쥐약을 먹은 동물을 살릴 방법이 없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도 하얀 털을 가진 개를 볼 때마다 나는 여전히 그날의 뒤안으로 돌아간다.
지난해 봄이 여름으로 건너가던 무렵, 머위가 자라던 뒤안의 흙담을 모두 허물었다. 메리가 마지막 시간을 보낸 자리였다.
흙담은 사라졌지만, 메리는 아직 그 아래에 있다.
입가에 하얀 거품을 묻힌 채, 앞발로 흙을 파며, 끝내 내 말을 듣지 않던 모습으로.
덧)
지난 3월 원고 청탁에 대한 제안 메일을 받았습니다.
송고한 글이 지면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