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옹-라이테 콜라보, 박하사탕 노래
봄이 밀려오던 날들 뒤로 며칠째 자발 없는 추위가 이어졌다.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서는 한낮이면 그늘의 흙이 동지팥죽의 거품 터진 자리처럼 군데군데 녹았다. 얼었던 물기가 슬그머니 주저앉아 흙이 푸석푸석해지면, 옹골지게 버티던 힘이 빠져나간 듯 일상도 맥없이 늘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을 때면 운동화를 꿰차고 강변이나 고택을 찾아 에돌았다.
노쇠해 가는 시골 풍정이 이어지는 지방도를 만나면 더욱 반가웠다. 간판은 떨어져 나갔고, 빛바랜 코팅지만이 그곳이 한때 북적이던 방앗간이었음을 간신히 짐작하게 했다. 유리문 앞에 서서 잠긴 자물쇠를 흔들어 보았다. 동네 사람 누구라도 보았다면 수상한 눈길을 보낼 성싶었다.
사람 그림자 없는 길목에서는 목줄에 묶인 강아지만 사정없이 짖어댔다. 외지인을 만난 김에 잘됐다 싶은지 앞발까지 들고 기를 썼다. 던져 줄 만한 것도 없어, 더 짖기 전에 서둘러 차에 올랐다.
그러고 보니 방앗간이 북적이던 시절의 추억 한 줌은 훔쳐 온 셈이었다. 늦겨울의 스산한 길목을 바라보고 있자니 오래전 봄방학의 한낮이 슬며시 되살아났다.
한 학년을 마무리하고 노루 꼬리만 한 봄방학도 끝을 며칠 앞둔 즈음이었다. 샛바람 속에 먼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부담이 슬슬 밀려왔다. 단위조합 마크가 찍힌 달력이나 밀가루 포대를 뜯어 새 교과서 표지를 싸 두었다. 새 옷을 한 벌이라도 얻어 입었다면 새 학년을 기다리는 설렘이 있었을까. 죄다 언니의 작은 옷을 물려 입으니 새로울 게 없었다.
계절이 바뀌는 적막함이 스몄다. 관심도 없던 라디오의 회전식 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려 주파수를 맞추는 데 몰두하거나, 굴러다니는 털실을 풀었다 감았다 하며 느릿느릿 시간을 보냈다. 추위가 좀 누그러진 한낮에는 지남석을 쥐고 제법 고슬고슬해진 흙을 긁어모아 놀거나, 돋보기로 빛을 모아 검정 종이 쪼가리를 태웠다. 그것도 시들해지면 헛간 귀퉁이에 숨어들어 썰매며 팽이를 어루만지다 나오곤 했다.
윗목의 고구마 통가리는 바닥을 드러냈고, 고즈넉한 집에는 허기를 달랠 만한 게 없었다. 자욱한 냇내로 엄마에게 들켜 야단을 맞을망정, 언니라도 집에 있었으면 새로 산 국자에 달고나를 만들어 달라 떼써 볼 것을. 낮잠 자는 동생과 볕 드는 흙마루에 자리 잡은 흰 강아지 메리뿐이었다.
대문 앞을 서성였다. 옆집 경옥 언니가 허리까지 닿는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들어갔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시내에 다녀온 듯했다. 대문 안으로 몇 걸음 걷던 언니가 다시 돌아 나와 내 손을 잡았다. 포동포동하고 뽀얀 손가락이 내 손등을 뒤집더니 손바닥 위에 하얀 사탕 네 알을 올려 주었다.
“언니가 조용히 있고 싶으니까 알았지? 넷이 하나씩이야.”
냄새로 먼저 존재감을 알리는 사탕이었다. 코가 뻥 뚫리면서 눈이 매캐해지고, 급기야 머릿속까지 바람이 돌아 나가는 맛이었다. 앞니와 맞닿은 혀끝에 한 알을 올려 두고 두 볼이 오목해지도록 힘껏 빨면 달콤한 물이 목구멍을 향해 쏜살같이 넘어가는 박하 맛이었다. 이 희고 화사한 기쁨을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그 속뜻이야 어찌 됐든, 사탕 네 알 앞에서는 다 옳은 말이었다.
뒤돌아서는 언니가 옆구리에 낀 사탕 봉지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경옥 언니는 판탈롱 바지를 나풀거리며 말없이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흙마루 위 메리는 벌떡 일어서 꼬리를 흔들 뿐 사탕에는 아무 권한도 없었고, 동생은 잠들어 있었다. 사탕은 모두 내 주머니로 들어갔다. 순한 동생이 깨어난다면 한 개쯤은 줄 마음이 있었다. 바로 한 개를 입에 넣어도 두 개가 남으니 기분 좋은 오후를 보내기에 충분했다. 사소한 시비가 생겨도 좋게 넘어갈 수 있을 만큼 든든했다. 마루 끝에 앉아 털이 다 누운 신발을 발끝에 걸쳐 흔들며 이은하의 「밤차」를 콧노래로 불렀다.
경옥 언니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 뒤로 우리 언니가 돌아왔다. 입안의 사탕은 이제 막 녹기 시작했다. 후다닥 깨물어 삼키고 시치미를 떼자니 박하 냄새가 진동해 들통날 게 분명했다. 실토하자니 두 개씩 나눠 먹어야 언니가 만족할 텐데, 그러기에는 어쩐지 손해였다. 하나만 주자니 언니가 힘으로 빼앗을 게 뻔했다.
빼앗기더라도 일단 저질러 보자 마음먹고 사탕 한 개만 내밀었다. 언니의 우악스러운 손이 주머니를 덮쳤고, 숨겨 둔 사탕까지 들키고 말았다. 쓸쓸한 오후를 구해 줄 내 작은 비상식량은 결국 언니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시망스럽게 웃는 언니의 표정이 소리 없이 말했다.
“그러니까 순순히 내놓아야지.”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경옥 언니에게 사탕을 받을 때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지만, 조용히 있으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기도 했다. 약속을 지키려면 울음을 그쳐야 했다. 그러나 똑같이 나눠 먹자니 억울해서 사탕을 돌려 달라고 고함을 쳤다.
그 와중에 자던 동생이 일어나 우두커니 앉았고, 언니는 사탕 두 개를 쥔 채 대문 밖으로 내달렸다. 동생을 외면할 수 없어 하나 남은 사탕을 입에 넣어 주었다.
나는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아니, 엉큼하게 그 이상의 것을 바라며 악을 쓰고 울었다. 그러면서도 입안에 문 사탕이 굴러나오지 않도록 혀를 조심조심 움직였고, 경옥 언니의 방문 쪽으로 귀를 함빡 열어 두었다. 언니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재빨리 울음을 멈출 참이었다.
하지만 이쯤이면 나를 부르고도 남았을 텐데 경옥 언니가 잠잠하자, 나는 더욱 목청을 높였다.
마침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언니가 아니라 할머니였다.
“아이고, 어서 각꼬(학교)를 열어야지. 시끄러워 어디 살겄냐.”
그 정도로는 정성이 부족했다. 이번에는 마루 위로 올라가 발을 동동 구르며 징과 꽹과리처럼 요란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경옥 언니의 방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고, 눈물이 마르면 억지로 짜냈다. 점차 기운이 빠져 괜히 시작했나 싶을 때쯤, 드디어 방문이 열렸다.
경옥 언니가 다정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 부리나케 담장 곁으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그러려고 신발이 놓인 자리부터 더듬었다. 못 이기는 척 울음 딸꾹질을 멈추고 돋움발로 서서 담장 위로 얌전히 손을 내밀어야지. 바지 옆 솔기에 눈물 묻은 손을 쓱 한 번 닦으면 준비는 끝이었다. 내 손에 사탕을 한 줌 쥐여 주면서 언니가 말할 터였다.
“이거 먹고 그만 울어. 옳지. 착하지.”
이러면 내 어수룩한 꾀가 먹히는 것이었다. 가슴이 도근도근 뛰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다가왔다.
그런데 경옥 언니는 방문을 활짝 열어 둔 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휴, 내가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사탕까지 줬는데. 그거 이리 내.”
나는 재빨리 입안에 남은 사탕을 오도독 씹어 삼켰다.
어느 주말, 겨우내 밭에 남아 있던 배추를 뽑으라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고 시골에 갔다. 가져간 반찬과 간식을 정리하다 보니 식탁 모서리에 사탕 봉지가 열려 있었다.
보는 이도 없는 어둠침침한 주방에서 박하사탕만 하얀 자태를 뽐냈다.
사탕 두 개를 주머니에 넣고 밭으로 향했다.
봄동 배추가 남아 있는 곳은 경옥 언니의 집터였다. 경옥 언니도 할머니도 그 터를 떠난 지 오래였다. 텃밭으로 변한 집터에 앉아 박하사탕을 녹였다.
아버지 한 알, 나 한 알.
행여 입에서 사탕이 굴러떨어질까 정성스레 녹이는 동안, 아버지와 나 사이로 봄바람만 휘돌아 나갔다.
레옹작가님의 연재북
<레옹의 콜라보>에 라이테 인터뷰와 카지노 게임 글 '쓸쓸하고도 충만한 박하사탕'이 노래로 만들어져 소개되었습니다.
힙합스타일의 경쾌한 멜로디가 천진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잘 드러낸 곡입니다.
방문하셔서 글과 노래 감상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