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장소를 찾다가 도심의 이면도로에 접어들었다. 상가 뒷골목을 몇 바퀴 돌던 중, 마당 딸린 주택 한 채가 불쑥 눈에 들어왔다. 낮은 담장 밖으로 무화과 열매와 시든 해바라기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초가을 햇빛을 머금은 노르스름한 기운이 꽃 둘레에 내려앉아 있었다. 해바라기꽃은 이미 절정을 지나 씨앗이 여물고 있었지만, 마른 꽃잎의 빛깔은 오히려 더 짙게 남아 있었다. 바람이 스치자 해바라기 줄기 끝이 흔들렸다. 마치 치자 물을 들인 옥양목을 빨랫줄에 널어 둔 듯, 노란빛이 낮은 담장 너머로 엷게 번져 나갔다.
흔한 풍경인데도 나도 모르게 그 앞에서 발길이 붙들렸다. 그 순간, 국민학교 정문 앞 꽃밭이 기억 속에서 아슴아슴 살아났다.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 정문 앞에는 아이들이 무시로 드나들던 텃밭이 있었다. 한쪽에는 늘푸른나무들이 서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계절마다 바뀌는 꽃밭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나무보다 꽃밭에 더 마음이 갔다. 그곳에는 손을 뻗으면 만지고 꺾을 수 있는 꽃들이 많아, 꽃밭에만 가면 무엇이든 놀이가 되었다. 별다른 이유가 없어도 우리의 발걸음은 그쪽으로 향하곤 했다. 바람이 불면 꽃들은 한쪽으로 한들거리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점심시간이 끝나갈 즈음, 운동장을 뛰놀던 아이들의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꽃밭으로 모였다.
“오늘 알지? 내가 봐 둔 거 있어.”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통했다. 눈빛과 턱짓이면 충분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눈치를 보며 다가갔다. 먼저 움직인 쪽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티를 내지는 않았다.
까치발을 해야 닿을 높이에서 해바라기꽃이 시들어 가고 있었다. 마른 꽃잎 안쪽에는 씨앗이 단단히 여물어 있었다. 줄기는 굵고 쉽게 꺾이지 않았다. 나는 손을 뻗어 줄기를 붙잡고 온 힘을 다해 꺾으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힘을 주자 손아귀에 땀이 차고 숨이 가빠졌다. 그래도 꽃송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연필을 깎을 때 쓰던 검정 손잡이 칼을 꺼냈다. 누군가 먼저 따 갈세라 서둘러 칼날을 폈다.
줄기에 칼을 대려는 순간, 누군가 해바라기꽃송이를 낚아채듯 꺾어 달아났다. 큰 키에 재바른 녀석이었다.
“메롱. 약 오르지?”
녀석은 이미 저만치 달아나 있었다.
쫓아가려다 멈춰 섰다. 마침 그때, 반에서 눈길이 가던 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그쪽을 지나가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모습을 들킬까 싶어 코스모스 무더기 속으로 몸을 숨겼다. 짓밟힌 꽃에서 풋내가 물큰 올라왔고, 멀어져 가는 웃음소리가 귀에 남았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가슴 한쪽이 자르르 떨렸다.
우리는 그렇게 꽃밭 주변을 맴돌다가 점심시간을 다 보내곤 했다.
하굣길은 늘 배가 고픈 시간이었다. 해바라기 씨앗을 까먹고, 샐비어 꽃을 따 꿀을 빨아 먹으며 긴 길을 걸었다. 가끔 핫도그 가게 앞을 지나면 기름 냄새에 발길이 더뎌졌지만, 주머니 속 동전은 친구들과 나눠 먹기에도 턱없이 모자랐다. 결국 침만 삼키며 다시 길을 걸었다.
그해 가을, 학교 건물 옆 담장 바깥에는 또 다른 노란 꽃이 다문다문 피어 있었다. 선생님들이 가꾸던 결명자밭이었다.
어느 토요일 실과 시간에 우리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햇볕이 정수리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줄기 끝에는 노란 나비 날개처럼 작은 꽃이 남아 있었고, 그 아래에는 여문 꼬투리가 달려 있었다. 우리가 할 일은 결명자 꼬투리를 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일처럼 보였다.
아이들이 한꺼번에 밭으로 들어섰다.
줄기를 꺾고 밟으며 서로를 밀치고 다녔다. 수확이라기보다는 헤집는 것에 가까웠다. 꺾인 줄기에서 진한 냄새가 올라왔다. 금세 밭에 진한 풀 냄새가 자욱이 깔렸다.
냄새는 곧바로 내 몸을 짓눌렀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서 있을 수 없어 밭에 쪼그리고 앉았다. 가을볕은 뜨겁고 냄새는 진했다. 숨을 크게 쉬어도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몸이 자꾸 휘청거렸다.
힘들다고 말하면 밭에서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끝내 입을 뗄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끝까지 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나 혼자 밭을 빠져나가겠다는 말은 차마 꺼내지 못했다.
몸을 가누기도 힘들면서 꼬투리 하나는 살그머니 주머니에 넣었다. 갈라 보면 무엇이 들어 있을지 궁금했다.
결국 구토를 하고 친구의 부축을 받아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어느 순간 나는 교실 바카라상에 엎드려 있었다. 친구들이 하나둘 돌아올 때까지 혼자 엎드린 채 움직이지 못했다.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결명자 꼬투리는 집에 돌아와서야 꺼내 보았다. 꼬투리를 벌리자 씨앗들이 나란히 들어앉아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따낸 것이었지만 우리 몫으로 남는 일은 없었다. 결명자는 선생님들이 마실 차를 달이는 데 쓴다며 전부 거두어 가셨다.
내 몫으로 남은 것은 주머니에 숨겨 온 꼬투리 하나와 그날의 지독한 냄새뿐이었다.
도심의 담장 너머에서 시든 해바라기를 바라보는 동안, 손에 넣지 못한 해바라기꽃송이와 주머니에 숨겨 온 결명자 꼬투리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해바라기꽃송이는 풋내와 두근거림으로 남아 있었다. 결명자밭에서는 나비 날개처럼 작고 노랗게 피었던 꽃보다 지독한 냄새와 어지럼증이 먼저 되살아났다. 서로 다른 기억을 품은 두 가을이 시든 해바라기 위에서 가만히 포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