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순 언니는 빨갛게 칠한 열 손톱을 활짝 펼쳐 보였다. 땅까지 질질 끌리는 삼단치마에 옷깃이 어깨를 다 덮는 알록달록한 블라우스를 입었다. 게다가 넘어지면 코가 깨질 듯한 굽 높은 구두까지 신었다. 머리띠를 하고 스카프도 둘렀다.
공동우물로 내려가는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곳에 딸 부잣집이 있었다. 대문간에는 골담초와 자리공이 자라고 있었다. 미순 언니는 그 집 막내딸이었다. 위로 언니들이 여럿 있으니 언니들 하는 양을 일찍부터 배우는 게 자연스러웠다.
큰언니는 내 엄마뻘이었고, 나머지 자매들도 일찌감치 국민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해 집을 떠났다. 대처에 자리 잡은 언니들은 집에 다니러 올 때마다 신기한 물건들을 가져왔다. 미순 언니는 그 물건들을 제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게 걸치고 나와 자랑했다.
귀꿈스러운 미순 언니는 넋 놓고 바라보는 우리에게 한마디 했다.
“안 돼. 우리 언니가 나만 입어 보라 했어.”
스카프나 머리띠를 둘러보고 싶었던 마음을 애초에 싹둑 잘랐다. 대차게 내뱉고 자세를 곧추세운 채, 짐짓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여배우처럼 휑하니 돌아섰다. 돌아설 때 훅 끼쳐 오는 바람에 야릇한 향내가 풍겼다. 엄마의 화장대에서 몰래 발라 보았던 코티 분첩 냄새와는 다른 향이었다. 꽃바람 같은 스카프와 향내가 어우러지자 조바심은 더해졌다. 심부름이라도 해 주고 기어이 한 번 목에 둘러보고 싶어 동동거렸다.
끝내 미순 언니는 대문간에 우리 자매만 남겨 놓고 구두를 삐딱삐딱 끌며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리공의 까만 열매가 살강에 드나드는 생쥐 눈처럼 우릴 비웃듯 빤히 보고 있었다.
“에잇, 우리도 집에 가자.”
분하고 서운하면서도 미련이 남은 내 마음과 달리 언니는 집에 가자고 재촉했다.
“집에 가면 언니가 손톱에 물들여 줄게.”
언니가 대문간의 자리공을 거칠게 잡아 훑었다. 열매가 터지면서 손바닥이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으깨면 붉은 물이 흘러나오는 자리공은 소꿉놀이의 좋은 재료였다. 실금 간 대접에 진액을 담고 물을 부어 박하 잎을 띄우면 소꿉놀이 물김치가 되었다. 독성이 있는 열매였지만 이를 말리는 어른은 없었다. 모두가 생업에 매달려 살던 시절, 우리끼리 하는 놀이는 그렇게 아슬아슬하고도 무사했다.
우리는 대문간 담벼락 그늘에 앉았다. 소꿉놀이와 공기놀이로 새까매진 손을 내밀자 자리공 진액에 손톱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이번에는 언니가 물든 손도 씻지 않고 집으로 후다닥 뛰어가 보자기를 들고 나왔다. 보자기를 대각선으로 접어 내 머리에 씌웠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히히거렸다. 서운한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이제 미순 언니네 집 가지 말자. 너희들도 가지 마.”
“응, 언니.”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그 집 담장을 타고 오른 덩굴에 까맣게 익어 가는 포도송이가 아른거렸다.
미순 언니가 꺼내 보이는 신기한 물건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미순 언니 머리에 분홍색 둥근 기둥이 달랑거렸다. 센베이 과자처럼 속이 빈 분홍색 물건에 머리카락이 돌돌 말려 있었다.
“너희들 이거 뭔 줄 알아? 구루뽕이야.”
방귀도 아니고 구루뽕이라니, 이름도 희한했다. 미순 언니는 이마에 대롱거리던 것을 쑥 빼서 보여 주더니 다시 앞머리를 돌돌 말아 깍지를 끼웠다.
“머리가 꼬불꼬불해진다. 너희들 이거 없지?”
집에는 왕빗과 대나무 참빗만 있었다.
“언니, 그거 안 아파? 나 하나만 해 줘.”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드라마 《초원의 집》의 로라 머리가 떠올랐다. 해수욕장 갈 때 엄마가 쓰던 챙 넓은 모자를 쓰고, 보자기를 찾아 앞치마처럼 두르면 딱 로라가 될 것 같았다.
“안 돼. 우리 큰언니가 안 된대.”
이번에도 언니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따라와. 언니가 빠마해 줄게.”
언니는 기찻길로 곧장 내려갔다. 기찻길이 지나는 비탈 밑에는 족제비싸리나무가 무성했다. 우리는 비탈로 내려가 줄기를 잔뜩 뜯어 왔다. 툇마루에 앉아 줄기의 잎을 다 훑어 냈다. 빈 줄기를 반으로 접어 그 사이에 머리카락 끝을 끼운 뒤 돌돌돌 말아 올렸다.
“언니, 아프다. 언제 풀어야 해? 가려워.”
“안 돼. 이거 금방 풀면 소용없어. 참아.”
《초원의 집》의 로라를 생각하며 참았다. 그러다 툇마루에 누워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 족제비싸리 줄기를 풀어 보니 머리가 라면 가닥처럼 꼬불거렸다. 엄마 모자를 쓰고 보자기를 앞치마처럼 둘러 《초원의 집》 로라 흉내를 냈다. 거울에 요리조리 비춰 본 모습은 마음에 쏙 들었다. 모처럼 꼬불거린 머리가 풀리기 전에 얼른 나가 자랑해야 했다.
공동우물로 빨래하러 가는 언니를 따라나섰다. 미순 언니가 거기 있었다. 빨래를 다 마쳤는지 옆구리에 대야를 끼고 일어섰다. 그런데 미순 언니가 일어선 자리에는 처음 보는 물건 하나가 남아 있었다. 잠시 뒤 미순 언니는 빈 대야와 수건을 챙겨 다시 우물가로 왔다.
“너희들 이거 뭔지 알아?”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미순 언니는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통의 마개를 열어 손바닥에 미끈한 것을 덜어 냈다. 수수꽃다리에서 나던 달큰한 향기가 났다. 젖은 머리에 문지르자 거품이 마구 일어났고, 거품이 부풀수록 향기도 짙어졌다.
“이거 유니나샴푸야. 머리 감을 때 쓰는 거야.”
머리에 수수꽃다리를 한 아름 꽂아 놓은 것보다 향내가 진했다. 구루뽕 때문에 서운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거 해 볼래?”
언니보다 내가 먼저 대답했다.
“나 해 볼래.”
언니가 가자미눈으로 쏘아보았다.
“너, 빠마머리 만드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머리 감을 거야?”
유니나샴푸와 로라 사이에서 나는 울상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