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내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다.
분노가 올라올 때, 왜 오는지 몰랐다.
그냥 화가 났다.
작은 말 한마디에 불이 붙기도 했고, 아무 일도 없어 보이는 날 갑자기 무언가가 터지기도 했다.
분노는 늘 예고 없이 왔고, 떠난 뒤에는 수치심을 남겼다.
나는 또 그랬구나. 왜 또 그랬을까.
없애고 싶었다.
이 감정만 없으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눌렀다.
오지 않게 하려 했다.
그런데 눌린 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 엉뚱한 순간에, 더 크게 올라왔다.
어느 날, 진료실 안에서 분노가 올라온 적이 있었다.
선생님이 내가 기대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을 때였다.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니었다.
나쁜 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바랐던 것과 달랐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는 크게 흔들렸다.
선생님이 물었다.
지금 어떤 느낌이에요? 화요, 라고 말했다.
선생님이 다시 물었다.
화가 나기 직전에는요?
나는 그 물음 앞에서 멈췄다.
화가 나기 직전. 그 순간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상대방이 내가 기대한 대로 반응하지 않았을 때.
그때 가장 먼저 온 것은 무엇이었나.
두려움이었다.
작고 빠른 두려움.
순식간에 지나가서 포착하기 어려운.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내가 뭔가 잘못한 건 아닐까.
이 사람도 결국 나를 떠나는 건 아닐까.
그 두려움이 먼저 왔고, 분노는 그 뒤를 따라왔다.
두려움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서, 나는 두려움은 보지 못하고 분노만 보았던 것이다.
분노는 두려움의 다음 문장이었다.
그것을 알고 나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분노가 올라올 때, 그 아래를 들여다보려 했다.
지금 화가 난다.
그러면 그 전에는? 두려웠다.
무엇이 두려웠나. 이 사람이 나를 버릴 것 같았다.
내가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다.
분노는 보호막이었다.
두려워요, 라고 말하는 것보다 화났어요, 라고 말하는 것이 더 단단하게 느껴졌다.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위험하게 느껴지는 환경 안에서, 나는 두려움을 분노로 번역하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아마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런데 그것을 알게 된 뒤, 두려움을 인정하는 것이 더 아팠다.
분노는 힘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려움은 무력하게 느껴졌다.
두려워요, 라고 인정하는 순간 나는 작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씩 알게 되었다.
두려움을 볼 수 있을 때, 나는 오히려 그것에 덜 휩쓸렸다.
폭풍이 어디서 오는지 알면, 조금은 대비할 수 있었다.
분노는 여전히 온다.
지금도 때로 화가 나고, 때로 그 이유를 모른다.
그런데 이제 분노가 올 때 나는 그 아래를 보려는 습관이 생겼다.
언제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불길이 올라온 뒤에야 깨닫는 날도 있다.
그래도 전보다는 조금 더 빨리, 조금 더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 분노가 덜 낯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