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진단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수도 있었다

by온기작가

진단을 받고 한참 뒤, 나는 다시 그날을 떠올려보았다.

작은 진료실, 조금 딱딱한 의자, 낮은 목소리.

그날 나는 무엇을 기대했을까.

이름이 생기면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왜 이런지 알면, 이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진단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었다.

감정은 여전히 출렁였고, 관계는 여전히 어려웠으며, 버텨야 하는 하루들은 그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름이 붙은 뒤에는 고통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도 했다.

이것이 경계선 성격장애의 증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게 되자, 나는 내 안의 혼란을 더 또렷하게 목격해야 했다.

그것이 오히려 더 힘들었다.

몰랐을 때는 막연히 힘들었다.

알고 나서는 구체적으로 힘들었다.

막연한 고통보다 구체적인 고통이 더 아프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래서 한동안 진단을 저주처럼 여겼다.

차라리 몰랐으면 어땠을까. 그냥 예민한 사람으로 살았으면 어땠을까.

이름이 없었다면 이 이름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런데 시간이 흘렀다.

어느 시점부터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들이 있었다.

진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내 반응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유기 불안이고, 이것은 감정 조절의 어려움이고, 이것은 이상화와 평가절하의 패턴이라고.

이름이 붙으면 조금 더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었다.

폭풍 한가운데 있을 때도, 지금 나는 폭풍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에는 그것조차 몰랐다. 그냥 빠져 있었다.

아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아는 것이 나를 붙잡아주기도 했다.

또 하나는 방향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막연한 고통에는 막연한 방향밖에 없다.

이름이 생기자 길이 생겼다.

경계선 성격장애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연구된 치료 방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정을 조절하는 법, 고통을 견디는 법, 관계 안에서 다르게 반응하는 법.

나는 그 방향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진단이 없었다면 그 문은 열리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가장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진단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나의 과거를 다르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장면들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왜 그렇게까지 두려워했는지, 왜 그 관계에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유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유가 보이자, 나는 나에게 조금 덜 가혹해질 수 있었다.

진단은 나를 규정하지 않았다.

진단은 나를 읽는 언어를 주었다.

그 언어로 나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이상한 거야,가 아니라. 이런 이유가 있었구나,로.

진단은 끝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이름에 갇혀서, 그 이름이 운명처럼 느껴져서.

나도 한동안 그랬다.

그런데 진단은 또한 시작일 수 있었다.

나 자신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자리.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를 묻기 시작하는 자리.

다르게 살 수 있는지를 조심스럽게 상상해보기 시작하는 자리.

그 자리에 서는 데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결국 나는 거기 서게 되었다.

시작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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