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수치심은 왜 진단보다 더 오래 남는가

by온기작가

수치심은 진단보다 먼저 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수치심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감정 중 하나였다. 진단명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나는 이미 오래도록 그것을 안고 살아왔다.

중학교 2학년 그날 밤 이후였다. 아버지가 한 일, 엄마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 나는 그것을 비밀로 삼으며 살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비밀은 이상한 방식으로 변해갔다. 일어난 일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겪은 내가 부끄러운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내 잘못인 것 같았다. 그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내가 그런 일을 겪을 만한 사람이라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아이는 그렇게 배운다. 말할 수 없는 일은 숨겨야 하는 일이 되고, 숨겨야 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된다고.

우리 가정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도 오래된 아킬레스건이었다. 누군가 가족에 대해 물어올 때면 어딘가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대답을 준비해야 했고, 어느 부분을 말하고 어느 부분을 숨길지 순간적으로 계산해야 했다. 화목한 가정을 보게 될 때는 더 이상한 감각이 찾아왔다. 부럽다기보다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왜인지 오랫동안 몰랐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것은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보았을 때 올라오는 감각이었다. 부러움보다 먼저 오는, 결핍의 통증 같은 것이었다.

수치심은 조용할 때보다 지목당할 때 더 선명하게 올라왔다.

자신 없는 부분을 누군가 건드릴 때, 내가 감추고 싶었던 무언가가 드러날 것 같은 순간이 오면, 수치심은 극한까지 치솟았다. 그리고 그 끝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수치심이 어느 순간 분노로 바뀌었다. 다 뒤엎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왜 그런지 당시에는 몰랐다. 수치심과 분노가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 안다.

수치심은 견디기 너무 힘든 감정이다. 그것은 단순히 창피하다는 느낌이 아니다. 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람이라는 감각, 내가 있는 그대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믿음에 가깝다. 그 감각이 극한에 이르면, 사람은 그것을 견디기 위해 다른 무언가로 전환하려 한다. 분노는 그중 하나다. 수치심은 나를 작아지게 만들지만, 분노는 잠깐이나마 나를 크게 느끼게 해준다. 무너지는 대신 뒤엎는 쪽을 선택하게 만든다.

나는 그 패턴을 오랫동안 반복했다.

수치심이 올라오면 분노가 따라왔고, 분노가 지나고 나면 다시 수치심이 남았다. 왜 그렇게까지 반응했을까, 왜 그 순간 그렇게 했을까, 나는 왜 이런 사람일까. 수치심은 분노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어지기도 했다.

진단명은 많은 것을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수치심은 설명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경계선 성격장애라는 이름이 붙고,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이해하게 된 이후에도, 수치심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어쩌면 진단을 받은 이후 한동안은 수치심이 더 커지기도 했다. 이제는 이름까지 붙었으니, 내가 문제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더 분명해진 것 같았다.

수치심은 이해보다 느리게 움직였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이 느끼는 것 사이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도, 수치스럽다는 감각은 금방 사라지지 않았다. 그 감각은 너무 오래, 너무 깊이 새겨진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의 그 밤부터, 말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던 그 아침부터, 오랫동안 쌓여온 것이었다.

그래서 수치심은 진단보다 더 오래 남았다.

진단은 어느 날 찾아왔다. 그런데 수치심은 이미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다. 진단이 끝나도 수치심은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는 데도, 그것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도 가끔 올라온다.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 다만 지금은 그것이 올라올 때 조금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나쁜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니라, 오래 혼자 감당해온 사람의 흔적이라고. 수치심은 내 잘못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내 잘못이 결코 아니다. 다만 내가 가장 오래 혼자 안고 있어야 했던 감정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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