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진단은 이해 되었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by온기작가

처음에는 괜찮은 줄 알았다.

진료실을 나오던 날, 나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체념이 오히려 이상한 고요함을 만들어주었다. 이름이 붙었으니 이제 알겠구나 싶었다. 설명이 되면 다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고요함이 진짜인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났다.

고요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의 체념이 가라앉고 나자 그 자리에 다른 것들이 들어왔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는 다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경계선 성격장애. 그 말을 되새길수록 무언가가 뒤틀렸다.

나는 그 단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특징들을 읽었고, 진단 기준을 읽었으며, 관련된 글들을 찾아 읽었다. 읽을수록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낯익었다. 버려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감정이 과하게 흔들리는 것, 관계 안에서 반복되는 패턴들. 그것들이 전부 내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이해가 된다는 것이 곧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해는 머리로 왔지만, 마음은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알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진단명이 설명해주는 나와, 내가 알고 있던 나 사이에서 나는 한동안 길을 잃은 것 같았다.

혼란이 깊어질수록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고 싶어졌다.

그것이 처음에는 원망이었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특정한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어딘가를 향해 왜 이렇게 되었느냐고 묻고 싶었다.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그 이유 어딘가에 내가 아닌 무언가가 있을 텐데.

그런데 원망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 화살이 방향을 바꾸었다. 밖을 향하던 것이 안으로 돌아왔다. 왜 나는 더 단단하지 못했을까. 왜 나는 그때 말이라도 해보지 않았을까. 들어줄 사람이 없어도, 말이라도 해볼 걸. 왜 그렇게 혼자만 참았을까.

자바카라은 원망보다 더 오래 남았다.

원망은 대상이 없으면 흩어지지만, 자바카라은 대상이 나 자신이기 때문에 어디서든 따라왔다. 자려고 누우면 올라왔고, 혼자 있을 때 올라왔으며, 가장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도 올라왔다. 왜 더 단단하지 못했을까. 왜 진작 도움을 구하지 않았을까. 왜 이 나이가 되어서야.

그 질문들은 나를 탓하는 형식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오래된 슬픔이었다.

더 단단했어야 한다는 말 안에는, 단단하지 않아도 괜찮았어야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말이라도 해볼 걸이라는 말 안에는, 말했어도 달라지지 않았던 기억이 있었다. 자바카라은 그 슬픔을 직접 마주하지 않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탓하는 것이, 그 시간들을 그냥 슬퍼하는 것보다 조금은 덜 무너지는 일처럼 느껴졌으니까.

나는 늘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그것이 얼마나 오래된 바람이었는지, 생각해보면 꽤 어릴 때부터였다. 흠 없는 사람, 단정한 사람, 누군가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사람. 그 바람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이제 조금 안다. 흠이 있으면 버려질 수 있다고 느꼈던 곳에서부터였을 것이다.

그런데 진단명은 그 바람 앞에서 선명하게 금을 그었다.

경계선 성격장애. 그 말이 내게는 어느 순간부터 흠 있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설명하는 말이 아니라 규정하는 말처럼. 나는 노력해온 사람이었는데, 관계 안에서 최선을 다해온 사람이었는데, 그 모든 것이 결국 이 진단명 아래 놓이는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든, 결론은 이것이구나.

자존감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요란하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냥 조금씩, 천천히. 거울을 보는 일이 불편해졌고, 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는 일이 어려워졌으며, 나는 어떤 사람이냐는 질문 앞에서 오래 멈추게 되었다. 나는 이제 무어라고 답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막막함이 왔다.

이걸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이 진단명을 받아들이는 일, 그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면, 그 시작 이후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회복이라는 말을 들어봤지만, 회복이 어떤 모양인지는 몰랐다. 나아진다는 것이 가능한지도 몰랐다. 이미 마흔이 넘었고, 이미 이만큼 지나온 뒤였다.

이해는 되었다.

그런데 이해가 된다는 것과, 이 모든 것을 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나는 한동안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었다. 진단을 받아들이기도, 완전히 거부하기도 어려운 자리에서. 이렇게 된 나를 용납하기도, 자바카라을 멈추기도 어려운 자리에서.

그 자리에 꽤 오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도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때는 그냥, 오래 걸리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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