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에 아들에게 잘난 척하려고 쓰는 글

함(咸) 괘 산다는 것. 6월 1일 결혼기념일... //////

by빼빼


내일은 6월 1일 무려 35주년 /결혼기념일.

오늘이 일요일이라서 한가함.


현재의 상황을 안다고 미래의 상황을 알 수는 없다. 또 과거의 어떤 상황을 안다고 ,

반드시 지금의 어떤 때가 만들어졌다고 볼 수도 없다.

내가 아내를 만난 일을 생각해 보면....


1988년도 가을쯤.


겨울 준비 우물을 파고 있었다.

땅을 파고 흙을 걷어내고 밖에서는 아버지가 흙을 받아주는 일이다.

한참 질척거리는 우물바닥을 파 내는 중 우물밖에서 아버지에 큰소리가 들리고 ,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쌍소리두 들렸던 거 같다. 다급하게 엄마가 얼른 나오란다.

우물 안으로는 흙이 떨어져 머리 위로 떨어진다.


상계동 산 골짜기에 집이 있었으니 수도시설이 미쳐 올라갈 수 없는 정도였다.

몇 년에 한 번씩 우물을 정비해 줘야 물이 나온다.

그 공사중 였다.

산 중턱에 우리 집 말고는 한 집 만 있었다.


밖으로 나와보니 아버지는 넘어져서 천식끼 있는 숨을 헐떡거리고 있고 , 남자 둘은 그런 아버지한테

쌍말을 하고 있었다.

뒷 집 남자들이다. 뒷 집은 신혼부부가 두 쌍이 살았는데 이들 중 남자 둘이서 아버지랑

우물 때문에 시비가 붙은 거다. 우물은 우리 거다. 중학교나 다닐 때 내가 판 것이다.

두 남자를 삽으로 죽게 뚜드려 팼다. 무지많이...

막 방위를 제대한 후 여서, 몸은 펄펄 끓을 때다.

상황이 너무 커 저서 아버지가 얼른 도망가란다.

널브러져 있는 남자들을 뒤로 난 산으로 도망쳤다.

산 위를 넘어 친구네 집으로 갔다. 피 묻은 작업복을 보고 친구 어머니는 엄청 놀래셨다.

얼른 내 옷을 벗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 주셨다. 참 이제 난감하다.


무작정 도망만 다릴 것도 아니고 친구집에 언제 동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자수하고 깜빵 가서 사는 것도 참....

난 방위시절 타령을 해서 육군 군단영창 벽제 군교도소에서 68일을 살고 나온 경력자 전과자다.

거긴 진짜 지랄이다.

감방은 진짜 가기 싫었다.


난 산에서 살았었다.

지리산 선비샘계곡 한편에서 대략 2년 정도 살았었다.

지금 하곤 달라서 당시에는 등산로가 아닌 곳은 1년 내내 사람 한 두 명 정도 보일 때다.

그러다가 어쩌다 집에 한 번 들르러 갔는데 군대 갈 때가 됐단다.

병무청에 문의해 봤더니 곧 가야 한단다.

이곳저곳 지원을 해 보니 거기도 별로 조건이 안 돼서 군지원도 안 덴단다. 그래서 방위 갔다.


산에서 사는 건 선수다.

이제 이렇게 된 마당에 다시 산으로 들어가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집에 가서 산에서 살 장비를 대충 꾸렸다. 단단히 꾸렸다.

아주 거기서 살다가 죽어야겠다고....

집에서 막 장비를 짊어지고 나오는데 저 밑에 길 외등빛에, 경찰관과 방범대원(아시죠? 이분들..)이

함께 집 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사정없이 반대편 산 쪽으로 뛰었다.

난 뛰는 거 산 타는 거 걷는 거 거의 달인이다. 서울 상게동부터 여수 향일암 까지도 걸어간 적도 있다.

제주도는 걸어서 한 바퀴 반 은 돌았다. (그 시절 유튜브문화가 있었다면 꽤 잘했을 거다.)

한참을 뛰어서 그 들을 따돌리고 주택가를 지나쳐 시장골목으로 내려 나오는데 ,

아~ 이번에 경찰 여러 명이서 이곳저곳에 서 있는다. 대략 난감 에 절제 절명이다.

또 그 깜빵생활을 해야 하느냐 아니면 무사히 지리산에 입성하느냐다.


어느 미용실셔터문이 거의 다 내려와 있는데 쪼그만 틈이 있었고 불은 켜져 있었다.

몸을 굽혀 굴러들어 갔다.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지.

한 60대 어르신이 계셨다.

뻥쳤다. 데모하던 학생인데 경찰에 쫏기고 있다고 사정하고 이 절체절명에 일신을 부탁했다.

그 어르신 사장님은 흔쾌히 하루를 거기 있으라 하고 , 아침에 가도 된다고 하고 쿨하게 퇴근하셨다.


난 또 지리산 선비샘으로 들어갔다. 거기 내가 헐어버리고 내려온 집이 있거든.

새로 잘 정비를 하고 앞으로 평생을 여기에 뼈를 묻으려고 준비를 잘했다.

대략 한 달 정도, 그런데 이상해 , ,,, 혼자가 싫다.

사람들과 보대끼며 살던 때가 그리웠다. 특별히 보고 싶은 사람은 없는데 혼자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때는 괜찮았고 또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찌어찌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 보니 검찰에 출두하고 재판받고 하면 ,

벌금형으로 마무리되게 합의하게 해 뒀 단다. 그렇게 난 또 깜빵 가는 걸 면했다.


그동안에 엄마 누나 여동생 남동생 심지어 아버지(아버지는 가금 밖에서만 )까지 ,

그 은혜로운 미용실을 다니셨다.

고마워서....

어느 날엔가 막내여동생이 미용실을 다녀오고 나서 다급하게 말했다.

거기에 예쁜 미용사가 왔단다. 참~ 하고 아주 괜찮단다.

별로 난 관심이 안 가고 귀등으로 흘려보냈다. 그런데 누나도 또 엄마도 거기다 아버지 까지도.

저 모지리 백수새끼 미용사아가씨 하나 잘 만나서 미용실 차려주면, 집안에 근심거리 한시름 놓을 거 같다는 작전이 이미 온 가족들 머릿속에 서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미용실 근처부터 가까운 동네까지 , 이 미용실아가씨한테 관심을 갖지 않은 남자들이 없었단다.

그런데 난 관심이 영~.

난 한참 연애 중이던 어떤 여자가 있었거든. 그래서인지 난 한 번도 가질 않았다.

담배가게 아가씨가 아닌 , 미용실 아가씨/


그런데 어느 날 더벅한 머리를 좀 다듬어야 할 때가 왔다.

마침 친구랑 산에 가서 노래 한 자리씩 하고 기타를 둘러메고 어슬렁대며 걷는데 그 미용실 앞이다.

쑈윈도 안을 보니 가족들이 얘기했던 미용사 아가씨가 있는데 , 실루엣이 꽤 보기 좋다.

옆에 있던 친구에게 말했다. " 내가 저 여자하고 3년 후에 결혼을 할 거다."


난 3년 동안 난공불락의 이쁜 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손무의 손자병법의 30%는 사용했던 거 같다.

나는 그때도 손에 항상 바카라은 있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김초혜 시인의 "사랑굿"을 좋아할 때다.

이 여자 쉽게 넘어 오진 않았다.

내 그때 짧은 인생에 최대의 숙제였다.


그 미용실 아가씨와 딱 3년 후 1991면도 6월 1일 날 우린 결혼했다.

아마 미용실을 차려서 살았더라면 더 낳았을까?

아마 난 영영~ 양아치 날건달로 살아왔을 거 같다. 아낸 그때부터 미용일을 하지 않았다.

나의 전용 미용사 다. ㅎㅎㅎㅎ

가족들의 기대에는 그렇게 부흥하지 않았다.

굶어 죽어도 아내 때문에 산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난 또 결혼한 백수가 됐다.

그렇게 우린 함 괘 35년을 살아냈다.


( 내일 이편은 3년 동안 그 난공불락의 요쇄가 함락되는 과정. 아내가 나한테 마음을 여는 과정

에피소드를 쓸 거다.

아내한테 물어봐야한다. 야한 거두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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