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것 싫은것
난 싫은게 너무 많은 사람이다.
불평불만이 많은게 아니고
언짢게 보여지는게 많다.
반면에 좋아하는건 그리 많지
않다
왜이렇게 사람이
꼬부라져 있는지...
그래두 그걸 잘 숨기구 산다.
인간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인식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세계를 구성한다.
인식의 바깥에 놓인 것은 대상이 아니라 공백이며, 그 공백은 종종 감정으로 메워진다.
그중에서도 가장 흔한 형태가 바로 ‘거부’다.
알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정보의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지만 아직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 상태, 다시 말해 ‘해석 이전의 상태’다. 그러나 인간은 이 해석 이전의 상태를 오래 견디지 못한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그대로 두기보다, 그것에 성급한 의미를 부여하려 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대개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진다.
왜냐하면 낯섦은 불안을 동반하고, 불안은 스스로를 방어하려는 본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싫어함’은 하나의 철학적 사건이 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본질적 판단이라기보다, 인식의 한계가 드러나는 방식이다.
우리는 어떤 것을 충분히 알지 못할 때, 그것을 규정함으로써 안정을 얻으려 한다.
다시 말해,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를 ‘싫다’라는 개념으로 축소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때 감정은 진실을 반영하기보다, 무지를 은폐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반대로 ‘좋아함’은 훨씬 복잡한 과정을 요구한다. 그것은 단순한 호감이 아니라, 이해를 통과한 감정이다.
대상이 지닌 맥락과 구조를 인식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며, 나와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생성된다. 그러므로 좋아함은 인식의 확장 위에서만 가능하다.
알지 못하는 것을 깊이 있게 좋아하기 어렵다는 말은, 이 점에서 필연적이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인간의 감정은 대상에 대한 반응이기 이전에, 자신의 인식 구조에 대한 반영이다.
싫어함은 종종 세계의 결함이 아니라, 이해의 부재를 드러내며, 좋아함은 세계의 가치라기보다 이해의 성취를 의미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감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묻는 일이다.
내가 싫어하는 그것은 과연 그 자체로 거부할 대상인가, 아니면 아직 이해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미지의 영역인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감정은 단순한 반응을 넘어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낯선 대상이 아니라,
낯섦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내 꼬부라진 시선을 숨기려구
늘 아들에게 꺼꾸로 잘난척을 하나 ??
내가 싫어하는 것들도 이젠
낯설지 않은데..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