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의다리

불황의 계절을 건너는 사람들에게

by정성균

배고픈 계절의 부엌


“할아버지, 보릿고개가 뭐야? 높은 산이야?”


이제 막 세상의 단어들을 조각조각 배워가는 어린 손녀가 제 조막만 한 손으로 내 소매를 잡아끌며 묻습니다. 맑고 투명한 눈망울을 들여다보며 나는 잠시 어떤 대답을 건네야 할지 아득해집니다. 그것은 발로 디뎌 넘는 흙과 돌의 고개가 아니라, 오직 시간의 무게와 삶의 의지만으로 넘어야 했던 계절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들추어보면 우리 선조들이 통과해 온 5월은 묘한 비밀을 품고 있습니다. 눈이 닿는 곳마다 푸른 생명력이 물결치고 들판의 작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데,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은 일 년 중 이때 가장 간절하게 이웃의 집 문을 두드려야 했습니다. 가을에 수확한 쌀은 긴 겨울을 지나며 이미 바닥을 드러내었고, 봄에 새로 심은 보리는 저 멀리 맥령(麥嶺) 너머에서 이제 막 이삭을 틔우기 시작하던 기묘한 시기. 채워지지 않은 빈 독의 서늘함과 초여름의 햇살이 동거하던 이 시절을, 사람들은 그 계절을 오래 잊지 못했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때였으니까요.


쌀통 바닥을 긁던 숟가락 소리가 부엌에 오래 남아 있던 새벽, 민초들은 주린 배를 달래며 매일 아침 안개 자욱한 산과 들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사람들은 산과 들을 뒤지며 어떻게든 오늘 하루를 넘길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버티던 때였습니다.


그 고개의 한복판, 외딴 산기슭 그늘진 곳에서 마주하는 풀이 하나 있습니다. ‘꿩의다리’. 줄기가 매끄럽고 미끈하게 잘 빠졌다 하여 산사람들은 이 풀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봄날 계곡가와 깊은 숲그늘에 가만히 고개를 내미는 이 연한 풀은, 가녀린 모양새와 달리 제 안에 독한 기운을 품고 자라납니다. 살아남으려다 보니 독한 기운까지 품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거친 세상을 버텨내기 위해 저마다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배고픔에 지쳐 그 푸르스름한 이파리를 그대로 입에 넣었다간, 속이 뒤집히고 온몸이 뒤틀리기 마련이었습니다. 주린 배를 채우려 마구잡이로 초근목피(草根木皮)를 찾아 헤매던 이들에게, 꿩의다리는 자칫 얼굴에 누렇게 부황(浮黃)이 들기도 전에 목숨을 잃게 만들 수 있는 야속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이 그 쓰고 아린 독초 앞에서 결코 무릎 꿇지 않았습니다. 자연에서 찾아낸 '구황(救荒)의 지혜'는 단순히 굶주림을 참아내는 인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먹지 못하던 풀조차 끝내 사람 입으로 들어가게 만들던 삶의 요령이었습니다.


이 매운 기운을 품은 풀이 식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선조들은 꿩의다리를 뜯어오면 끓는 물에 달래듯 데쳐낸 후, 흐르는 찬물에 몇 시간이고 밤새도록 그 아린 맛을 우려내었습니다. 그렇게 제 안의 독한 기운을 다 덜어낸 푸른 잎들을 다시 볕 좋은 마당에 널어 바짝 말렸습니다. 가을바람과 겨울 볕을 견디며 바스러질 듯 말라비틀어진 꿩의다리는, 마침내 오래 일한 노인의 손등처럼 푸석하고 메마른 묵나물로 거듭나 다음 해 봄의 귀한 양식이 되었습니다. 거친 소나무 속껍질(송피)을 밤새 절구에 찧어 가루를 내고 보리가루와 섞어 떡을 빚던 공력처럼, 독초의 기운을 다스려 사람을 살리는 양식으로 바꾸어내던 생존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냥 묵묵히 우려내고 말렸을 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아린 독초가 깊은 정성을 거치면 한방에서 ‘마미련(馬尾連)’이라 불리는 약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산꿩의 다리, 자주꿩의다리, 금꿩의 다리 할 것 없이 제 몸의 매운 기운을 스스로 다스려낸 이 식물은, 비로소 인간의 끓어오르는 혈압을 가라앉히고 흐려진 눈을 조금씩 다시 뜨게 하는 힘을 갖게 됩니다. 몸속의 염증을 가라앉히고, 황달 같은 간 질환이나 편도선염을 다스리며, 열병으로 인해 속이 답답해 팔다리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증상을 완화하는 데 이만한 약재가 없다 합니다. 차가운 물속에서 밤새 제 안의 아린 맛을 덜어내며 배웠을 그 침묵의 시간으로, 이제는 밤마다 뒤척이는 사람들의 속을 조금 잠잠하게 해주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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