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끝에서 나를 줍다

by정성균

손마디에 박히는 종이의 질감


종이 위에 펜을 올리고 글자를 한 자 한 자 새깁니다. 나를 고쳐 쓰는 성실한 과정이며, 동시에 굳어있던 손가락을 깨우는 노동입니다. 우리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온종일 타인의 요구에 응답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기대를 채우려 애쓰다 보면, 본인이 지금 무엇을 느끼는지, 마음의 물결이 어디로 흐르는지는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기록은 밖으로 흩어지던 시선을 안으로 접어 들이는 일. 그 과정에서 외면해 왔던 감정과 직접 맞서는 감각적인 투쟁입니다. 바카라상 앞에 앉아 하얀 여백을 마주하는 시간은 누구에게도 침범받지 않는 독립적인 영토입니다. 여기서 적는 문구는 남에게 보여주려고 꾸미는 장식물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 생각을 이어가는 행위, 그 자체가 스스로를 향한 지극한 예우입니다. 펜 끝이 종이를 긁으며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는 현재 이곳에 살아있음을 알리는 맥박입니다.


글쓰기는 머리로만 하는 공상에 머물지 않고, 직접 손을 움직여 실체를 빚어내는 참된 노동입니다.


가면 뒤에 갇혀 있던 목소리


기록하지 않고 살던 시절의 일상은 그 모습이 불분명했습니다. 머릿속엔 수만 가지 상념이 떠다니는데 정리가 안 되니 그저 소음으로 남았습니다. 외부의 목소리에는 민망할 정도로 기민하게 반응하면서, 내 안에서 들려오는 작은 떨림에는 귀를 닫고 살았습니다. 상태를 설명할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입을 닫아버리거나, 상황에 맞지 않는 말로 본심을 가리곤 했습니다.


상담실에 앉아 타인의 고통을 경청할 때도 속으로는 무척 괴로웠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다독이는 조언을 건네면서도, 정작 본인의 마음이 보내는 위험 신호는 모른 척했습니다. 타인을 돕는 '상담가'라는 역할은 약점을 감추는 방패가 되었습니다. 타인에게는 속임 없이 자신을 마주하라고 권하면서, 본인은 민낯을 보기가 두려워 뒷걸음질 쳤습니다.


나는 나를 속이고 있었습니다. 어느 밤, 바카라상 앞에 앉아 펜을 쥐었는데 손가락이 돌처럼 굳어버렸습니다.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었으나, 숨겨진 사실을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손은 한 글자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타인을 향하던 시선을 나에게로 돌리는 길은 이토록 멀고 험했습니다. 나를 관찰한 기록이 부재한 삶은, 타인이 작성한 도면대로 움직이는 수동적인 부품일 뿐입니다.


서툴지만 투명한 첫 발자국


처음 펜을 잡은 건 특별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내 안에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잠재울 최소한의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처음 적은 문구들은 글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투박했습니다. 종이 위에서조차 이름 모를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나를 예쁘게 꾸미려 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너무 아프다"라는 명확한 말 한마디를 못 해서 뱅뱅 돌려 말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를 속이려는 손가락이 미워 펜을 던져버린 밤도 많았습니다. 들키고 싶지 않다는 무서움이 생각의 흐름을 막았습니다. 펜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불편한 기분이야말로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억지로 입혔던 수사들이 허물처럼 벗겨질 때, 비로소 숨김없는 진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자신을 살핀다는 것은 못난 부분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적어내는 일이며, 그 문장을 적는 순간 손끝이 잠시 멈추는 경험까지 감당해야 하는 용기입니다. 비겁하고, 게으르고, 질투 섞인 어두운 마음을 글로 남기는 일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과해야만 진짜 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글쓰기는 자신을 해부하여 그 안의 풍경과 대면하는 치열한 여정.


쓰고 나면 비로소 정리되는 것들


글을 적을 때 본인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종이 위에서도 자꾸 방어벽을 세우게 됩니다. 아프거나 부끄러운 기억을 만날 때면 손가락이 멈추고 흐름이 툭 끊깁니다. 하지만 이 멈춤을 견디고 다음 글자를 밀어낼 때, 진짜 변화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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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현장에서 건져 올린 생각과 마음의 결을, 바카라 속 문장과 함께 조용히 전합니다. 스친 만남이 믿음으로 이어져 각자의 하루에 힘을 더하는 장면들을 담담히 써 내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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