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입항기
비행기가 공항에서 이착륙할 때가 가장 위험하듯, 거대한 선박 역시 항구에 들어서고 나갈 때가 가장 위험천만한 순간이다. 비유하자면, 초보 운전자가 외제 차로 가득 찬, 좁디좁은 지하 주차장에 소중한 내 차를 밀어 넣는 심정과 같다. 까딱해서 접촉 사고라도 나면? 견적 수백만 원은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수십 년 바다를 누빈 베테랑 선장이라 해도, 처음 들어서는 복잡한 항로나 낯선 항구 앞에서는 영락없는 초보 운전자가 된다. 수시로 바뀌는 해류와 종잡을 수 없는 수심 때문에 오감이 곤두선다. 한 치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다. 몇 백억 원을 호가하는 화물과 선박, 그리고 항만의 부두 시설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대형 손실이 발생한다. 만약 싣고 있는 게 기름이라면? 유출되는 순간 항구는 마비되고, 국가적인 해상 오염 재앙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 바로 '도선사(Pilot)' 제도다. 아예 강제 도선(무조건 도선사 승선)을 규정한 항구도 많다. 도선사는 항구 안에서 선장을 대리하거나 보좌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야말로 그 항구 바닥을 손바닥 보듯 훤히 꿰뚫고 있는 전문가들이다.
물론 해운회사 입장에서는 경비 절감을 위해 선장 스스로 접안하는 '자력 도선'을 선호하지만, 조건이 까다롭다. 특정 항구를 수없이 드나든 베테랑 선장에게만 예외적으로 면제권을 준다. 도선사가 되려면 수십 년간 항해사와 선장 경력을 쌓은 뒤, 지옥 같은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연봉 수준도 국내 10위권 안에 들 만큼 어마어마하다. 모든 항해사의 로망, 그 끝판왕이 바로 도선사다.
우리 배는 베테랑 도선사의 능숙한 지휘 아래 드넓은 짜오프라야강을 거슬러 올라가(이미지 10.png), 무사히 방콕항 부두에 닻을 내렸다. '방콕'이라는 이름, 사실 태국어 본명은 176자나 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이름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뜻을 풀면 '천사의 도시, 위대한 도시, 영원한 보석의 도시...' 같은 화려한 수식어가 끝없이 이어진다.
1983년 8월,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입항 수속이 끝나자마자 수십 명의 태국 노무자가 벌떼처럼 승선해 하역 작업을 준비했다. 그런데 선미 갑판 쪽이 시끌벅적해졌다. 가보니 세상에, 갑판 위에 노점 포장마차가 개업을 했다! 작업자들을 위한 간이 식당 겸 쉼터였다. 적당한 조명과 태국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제법 운치가 있었다. 순식간에 삭막하던 선미 갑판이 휴식 공간이자 흥겨운 유흥주점으로 변모했다.
그때, 에이전트(대리점) 직원이 나에게 두툼한 봉투를 건넸다. 싱가포르에서 온 왕링링의 편지와 전보였다. 긴 항해에 찌든 피로가 얼음 녹듯 사르르 풀렸다. 전보는 짧았지만 강렬했다. "엄마와 힐튼 호텔 도착. 방콕 관광 중. 당직 비번 때 연락하자."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기관사의 정박 당직은 24시간 맞교대다. 링링은 대리점을 통해 우리 배의 도착 시간을 정확히 파악하고 어머니와 함께 방콕으로 날아온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당직을 마친 다음 날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당직 근무 중, 선내 순찰(Patrol)을 하다가 잠시 사관 메스룸(Mess Room)에 들렀는데, 나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선배 항해사들에게 방콕의 실상에 대해 대충 듣긴 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언뜻 보기에 30여 명의 젊은 태국 처자가 메스룸 가득 활짝 웃고 있었다. 내가 귀신에 홀린 건가? 내 눈을 몇 번이나 의심했다. 하얀 허벅지가 드러나는 짧은 반바지와 미니스커트, 가슴이 보일 듯 말 듯 한 민소매, 긴 머리 처녀, 숏컷 처녀, 딱 붙는 청바지를 입은 처녀, 키 큰 여자, 아담한 여자... 모델 선발대회 대기실이 따로 없었다. 마치 백화점 쇼윈도에 예쁜 옷을 입힌 마네킹들을 진열해 놓은 것 같았다. 선원들은 그저 맘에 드는 마네킹을 하나씩 '초이스'하면 되는 구조였다.
그들은 선원들의 선택을 기다리는 직업 여성들이었다. 동작 빠른 3등 항해사는 이미 맘에 드는 여성을 골라 룸키(Room Key)를 손에 쥐여주고는, 안전모를 쓰고 작업복을 챙겨 입고 갑판으로 달려갔다. 부두 노무자들의 하역 작업을 관리하러 가는 길이었지만, 그의 눈은 이미 업무 시간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80년대 방콕은 관광 산업이 국가 GDP의 30%를 차지했는데, 그중 이 SEX 산업이 엄청난 비중을 차지했다. 놀라운 건 정부에서 이를 허가하고 보호하는 슬롯 단체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태국어에 '샹콤'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슬롯'나 '단체'를 뜻한다. 태국은 공산주의나 슬롯주의가 아니지만, 소속감을 엄청나게 중요시한다.
비록 매춘을 업으로 삼고 있지만, 이 '샹콤'이라는 조직에 소속되어 일한다는 것에 수치심보다는 일종의 자부심(?), 혹은 안정감을 느끼는 듯했다. 개인의 일탈로 조직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정부 차원에서 성병이나 피부병 등 위생 관리를 철저히 한다. 포주 관리, 보안, 경비까지 정부가 담당하니, 도난이나 폭행, 분쟁 같은 잡음을 들어본 적이 없다. 선장이나 회사도 이들의 승선을 암암리에 묵인해 주었다. 어쩌면 스트레스에 짓눌린 남성 선원들을 위한 복지 차원이었을지도 모른다.
1주일 후면 떠나야 할 항구의 인연이지만, 그 기간만큼은 그들은 진심으로 '커플' 역할을 해준다. 빨래, 청소, 쇼핑은 기본이고 가이드 역할까지 자처한다. 심지어 자기가 태어난 시골 고향으로 데려가 가족들과 함께 태국 전통 음식을 대접하기도 한다. 태국은 95%가 불교를 믿는 나라다. 이들을 통해 태국의 깊은 문화와 역사도 자연스레 알게 된다. 선원들에게 이보다 더한 천국이 어디 있겠는가. 모든 항구마다 이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남자들의 직업 선호도 1위는 도선사가 아니라 원양 화물선 선원이 될 게 분명했다. 경쟁률이 도선사보다 훨씬 높을 터였다.
태국은 흥미롭게도 모계 슬롯의 전통이 강해 여성들이 산업 전선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가난한 농촌 여성들이 대거 이런 직업 여성의 길을 택했다. 또 하나 놀라운 건, 대한민국에서는 엄중한 마약으로 취급되는 대마초를 태국 농촌에서는 버젓이 재배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태국 농촌 인구는 전체의 60%나 된다. 만약 정부가 대마초를 합법화하고 수출까지 허용한다면 농가 소득은 10배 이상 뛸 것이 뻔했다. 당시 야당 총수는 차기 대선 공약으로 이 대마초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매춘은 둘째 치고, 대마초 허용은 가시적인 소득 증대 효과는 있겠지만 슬롯 전체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위험한 불씨였다.
그때, 선장님에게서 다급한 내선 전화가 왔다.
"3항사! 화장실 변기가 막혀서 똥물이 역류하고 냄새가 진동을 해! 미치겠어!"
선내 오수처리장치(STP)가 고장 난 것이다. 3등 기관사인 내 담당 장비였다. 비행기처럼 선박도 배설물을 기계적으로 분해해서 바다에 버리는 원리인데, STP는 항해에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에어컨, 냉동기, 보일러와 함께 3기사의 핵심 업무였다.
부리나케 달려가 점검해 보니, 필터와 배관이 꽉 막혀 있었다. 천장으로 지나가는 파이프를 분해하는 순간, 압력을 견디지 못한 똥물이 펑! 소리와 함께 터져 나왔다. 아... 필터에는 콘돔과 생리대가 꽉 막혀 있었다. "우웩--" 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천국 같은 방콕항에서 마주한, 가장 지독하고 현실적인 지옥이었다.
어떻게든 장비를 수리하고 몇 번이나 샤워를 했지만, 똥물 냄새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지독한 똥물 냄새를 짙게 풍기는 3등 기관사. 하지만 지금 힐튼 호텔에서는 링링이 눈이 빠지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