벵골만의 연가, 암호가 된 손편지
해적이 출몰하는 위험한 해협을 지나면 호수와 같이 맑은 인도양이 펼쳐진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파란 수평선만 보이고 밤에는 하늘의 별만 총총히 빛나면 선원들은 모두 천문학자가 된다. 갈릴레오가 오래전에 지구가 둥글다고 한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인도양에는 한국의 원양어선인 듯 '동원 501호'가 참치를 잡고 있었다. 반가워 손을 흔들어 주고 우리는 인도 벵골만으로 진입하였다. 이번 목적지는 캘커타항이다. ETA(예정 도착 시간)는 24시간 후. 신혼 주말부부가 토요일을 기다리듯 선원들의 상륙은 항상 설렌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탐험가가 된 듯 가슴이 뛴다.
선박의 해기사는 누군가에게는 꿈의 온라인 게임일지 모른다. 대학 시절 의식주와 학비를 해결해 주고, 졸업 후엔 병역 혜택과 육상의 2배에 달하는 고액 연봉이 보장된다. 승선 중에도 생활비가 들지 않으며 상륙 수당은 덤이다. 세계 각국을 여행하며 현지 친구를 사귈 수 있고, 출퇴근은 5분이면 충분하다. 선내의 체육시설과 도서관, 그리고 면세로 즐기는 양주는 고된 생활의 위안이 된다. 막 승선한 3등 기관사인 나는 침대에 누워 이런 자기 위안을 하며 잠시 철학자가 되어 보았다.
바카라상 위엔 싱가포르의 연인 링링이 건네준 사진이 흑백 액자에 담겨 걸려 있었다. 나는 영한사전을 뒤져가며 한 줄 한 줄 정성을 다해 편지를 썼다. 문법이 맞는지, 내 그리움이 온전히 전달될지 알 수 없었지만 펜촉 끝에 온 마음을 담았다.
하지만 바다는 언제나 평온한 호수가 아니었다. 오후 당직을 마치고 쉬려던 순간, 기관실에서 쇠망치 두들기는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엔진이 멈춰 섰다. 고속도로 위에서 자동차가 멈춘 듯한 치명적인 위기였다. 엔진이 꺼지면 선박은 방향을 잃고 표류하며, 거센 풍랑을 만나면 거대한 배도 낙엽처럼 위태로워진다.
"엔진 스톱!"
기관부 10명 전원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작업복을 꿰어 입고 기관실로 집결했다. 피스톤 링 파손으로 배기 밸브가 고착된 상황이었다. 대기 온도 40도, 엔진의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기관실 온도는 50도를 웃돌았다. 70년대 일본에서 건조된 노후선이라 고장은 숙명과도 같았다. 6시간 동안 기름과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사투를 벌인 끝에야 엔진은 다시 힘찬 고동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선을 넘나든 해적의 위협과 엔진 고장의 고비를 이겨내고 드디어 인도 캘커타 항구에 입항했다. 세관 수속을 마치자 대리점 직원이 내게 꽃 그림이 그려진 향긋한 국제 우편 한 통을 건넸다. 링링이 보내온 손편지였다.
나의 소중한 당신에게,
당신의 배가 싱가포르 항구를 떠나 멀어질 때, 제 마음의 일부도 함께 바다로 떠나보낸 것 같았어요. 당신이 가르쳐준 한국말 '안녕'이 만남의 인사인지 작별의 인사인지 한참을 생각했답니다.
지금쯤 당신은 어디쯤 항해하고 있나요? 당신이 말해준 말라카 해협은 무사히 지나쳤는지, 밤마다 배 위에서 본다는 그 수많은 별 아래서 제 생각을 가끔은 하는지 궁금해요. 당신이 선물해 준 그 짧은 시간들이 제게는 센토사섬의 모래알보다 더 반짝이는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언어는 달라도 당신의 눈빛에서 읽었던 그 진심을 믿어요. 바다는 위험하고 엔진 소리는 거칠겠지만, 당신의 방 바카라상 위에 놓인 제 사진이 아주 작은 위로라도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잉크를 꾹꾹 눌러 쓴 이 글자들이 당신에게 닿을 때쯤이면, 우린 조금 더 가까워져 있겠죠?
몸 건강히, 그리고 무사히 항해를 마치길 기도할게요. 인도의 낯선 풍경 속에서도 당신의 마음 한구석엔 언제나 싱가포르의 바람과 제가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당신을 기다리는 링링으로부터.
사전을 옆에 두고 암호를 해독하듯 읽어 내려간 링링의 필기체 손편지. 문장을 이해하는 데 몇 시간이 걸렸지만, 편지지가 닳도록 읽고 또 읽었다. 가슴은 이미 내일 상륙할 캘커타의 거리보다 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