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3. 같은 꿈을 꾸었던 사람들

— 우리는 왜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을까

by삐재

싱가포르에서 회사를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다.


내가 속한 글로벌 회사의 아시아·태평양 본부가 문을 닫게 되었다.


다른 나라로 이동하거나,
좋은 조건으로 퇴직할 수 있는 선택지가 주어졌다.


나는 표정 관리를 하면서도
해외 이동 옵션은 처음부터 접어두었다.

아이들이 싱가포르 학교생활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좋은 회사 경력도 있었고,
목돈도 받았으니,

비슷한 업계로 옮겨
무난한 삶을 이어가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무엇에 홀렸을까.


이제 막 말레이시아에서 공장을 시작한 지인이
현장으로 우리 가족을 초대했다.

아직 공사도 덜 끝났고,
조직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공장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장이 뛰었다.


어릴 적 아버지 공장에서 느꼈던
웅장함과 긴장이 다시 느껴졌다.


“세상에 필요한 것을 만든다.”


그 감각이 좋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마음먹었다.


‘이 사람들과 한번 가보자.’


무식이 용맹이라고
베트남 공장은 내가 맡아서 해보겠다고 선언했다.


신기하게도
우리 셋은 취향이 비슷했다.


종교 이야기,
운동 이야기,
음악 이야기,
술 이야기까지 잘 통했다.


위아래로 여섯 살 차이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들어가니
셋 다 세 살 차이가 되었다.

왠지 그게 마음에 들었다.


나보다 먼저 합류한 친구는
한국에서 외국계 기업 대표를 하던 사람이었다.


서글서글 잘 웃었고,
영어도 잘했고,
사람을 참 편하게 만드는 착한 친구였다.


우리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 친구와 나는 공장을 하나씩 맡아서

각각 대표가 되고

대주주를 회장으로 모셨다.


서로 맡은 일 때문에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은행 사람을 만나거나
중요한 거래선 미팅은 꼭 셋이 같이 갔다.


그리고 밤에는 숙소에서 맥주를 마시며
성공한 사업가들의 자서전을 읽었다.


『이병철』, 『정주영』, 『김우중』 같은 바카라을 읽으며
우리도 언젠가는
큰 회사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때는 정말 그럴 줄 알았다.


신기한 것은
사람은 힘들었던 시절을
더 반짝이게 기억한다는 점이다.


우리 사업도 그랬다.


우리 사업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했다.

공장이 완공되고,
직원을 훈련시키고,
각종 인증을 빠르게 받아냈다.


회사는 금세 자리를 잡았다.

공장은 3교대로 돌아갔고,
나는 밤에도 수시로 현장에 나갔다.


직원들을 격려하고,
라인을 점검하고,
함께 야식을 먹었다.


직원들은 우리 회사 야광 점퍼를 입고
시내를 자랑스럽게 돌아다녔다.


은행도,
대사관도,
발주 업체도
우리 회사를 모범 사례처럼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셋의 관계는 조금씩 멀어졌다.


같이 있는 시간도 줄었고,
조금씩 마음속 계산도 달라졌다.

콩 한쪽 나눌 때는 웃으며 나누지만,
수박만큼 커지면
갑자기 계산이 복잡해진다.


상장을 준비하면서
지분 이야기는 없던 이야기가 되었다.


말로 했던 약속은 지워지고,
그걸 기억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같은 회사에 있었지만
조금씩 다른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회사를 떠나는 길을 택했다.


내가 떠난 후

3인 대표 중 한 명이었던 그 착한 친구도
원래 다니던 회사로 돌아갔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시간 속으로 흩어졌다.


그 후로도 나는 한동안
그 시절 이야기를 일부러 피했다.


너무 뜨거웠던 시간은
오히려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동안 멍했다.


지분 문제보다도,
잃어버린 기회보다도,

밤늦게까지
미래를 이야기하던 장면들이 먼저 떠올랐다.


“형님, 우리 진짜 한번 크게 해봅시다.”


그 말이 아직도 귀에 맴돈다.



생각해보면
내 인생에는 그런 사람들이 몇 명 더 있었다.


누구보다 밝았고,
누구보다 에너지 넘쳤고,
누구보다 멋지게 살 것 같던 사람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들이 먼저 사라질 때가 있다.


말레이시아를 떠난 뒤에도 그랬다.

정말 잘될 것 같던 젊은 사장,
누구보다 긍정적이고 활기차던 후배.


그들도 어느 순간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사람을 볼 때
지금 누구와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더 유심히 보게 된다.


함께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인연이다.


같은 꿈을 꾸는 일은 쉽다.


하지만,

끝까지 같은 시간을 살아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사람들은 결국
각자의 현실과 선택 속으로 흩어진다.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너무 빨리 사라진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대기업에 다니는 아들이 내게 물었다.


“아빠, 혹시 ○○○님 아세요?”


제가 외국계 은행 담당자와 친하게 지내는데,
자기 아버지 이름을 말하며
아빠는 아실 거라고 하더라구요.


나는 대답대신 물었다.

그 친구는 어떤 친구인데?


저보다 3살 적은 친구인데

정말 성실하고 서글서글한 친구예요.


“그래? 지 아빠와 똑 같은 친구인가보네.”


그리고 잠시 멈췄다.


“그 친구 아빠도
사람 좋고 서글서글 하던 친구였었다.”



신기했다.


우리는 이미
각자의 시간 속으로 흩어졌는데,


또 다른 시간을 통해
조용히 이어지고 있었다.


한때라도

진심으로 믿어주었던 시간.


생각해보면
그것만으로도
오래 남을 인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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