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신의 죽음에서 위버멘쉬까지

by김별


니체가 말하는 초인의 길


니체의 바카라을 읽으면 처음에는 ‘신의 죽음’, ‘위버멘쉬’ 같은 거대한 말 앞에서 조금은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개념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해서 보면 니체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의외로 단순하다.


“남이 정해준 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될 것인가?”


니체는 오랫동안 서양 문명을 지배해온 천상과 현실 세계의 이원론을 비판했다.

플라톤의 이데아에서부터 기독교의 천국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현실 너머의 완전한 세계를 꿈꾸며 살아왔다. 그러면서 눈앞의 현실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현재의 삶은 참고 견뎌야 할 불완전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니체는 바로 이 생각을 뒤집는다.


그가 말하는 ‘대지’는 우리가 실제로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이다. 기쁨도 있고 고통도 있으며,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는 그 현실 세계는 완벽하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다.

그러나 니체는 바로 그 불완전한 현실을 긍정하라고 말한다.


신은 죽었다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은 신이라는 존재가 실제로 죽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랫동안 인간의 삶을 지배해온 신과 같은 절대적 가치와 도덕의 권위가 무너졌다는 뜻이다.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고통을 참으면 저 세상에서 보상받는다.”

과거에는 이러한 가치가 신의 이름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그 절대적인 기준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생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야 하는가?”

니체의 대답은 냉철하다.


“네가 스스로 만들어라.”


신이 사라진 뒤에 인간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자유는 그에 따른 바카라임을 동반하기 때문에 편안한 선물만은 아니다.


니체의 철학은 단순한 무신론이 아니다. 그는 신이 사라진 자리를 허무로 채우지 말고 인간 스스로 새로운 가치로 채우라고 요구한다.




힘에의 의지


그렇다면 무엇으로 새로운 삶을 만들어갈 것인가.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가 그 동력이다.

이 말을 흔히 권력욕이나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으로 오해하지만, 니체가 말하는 힘은 훨씬 넓은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자신을 성장시키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며, 스스로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내려는 생명력이다.


예를 들어 내가 운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늘은 비가 오고 몸도 무겁다고 하자.

“오늘 하루쯤 쉬지 뭐.”

이것도 충분히 가능한 선택이다. 그러나 만보 걷기를 스스로 목표로 정해놓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비가 내린다.

몸은 무겁다.

걷기가 귀찮다.

그런데도 우산을 들고 현관문을 나선다.


대단한 영웅이 된 것은 아니다. 세상을 구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한 걸음 나아갔다.

바로 이런 것이 니체가 말하는 자기 극복이다.


위버멘쉬는 하늘을 날거나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어제의 자신을 오늘 조금 넘어서는 사람이다.

그래서 만보 걷기가 힘든 사람에게 비를 맞으며 밖으로 나가는 작은 의지 역시 위버멘쉬의 정신을 실천하는 한 장면이 될 수 있다.

자기 극복은 거창하지 않다


우리는 ‘자기계발’이라고 하면 대개 더 큰 성공을 떠올린다.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돈, 더 많은 성취를 생각한다.

그러나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남보다 얼마나 앞섰느냐가 아니라 어제의 자신을 넘어섰느냐에 가깝다.


바카라을 읽기 싫은 날에도 몇 쪽을 읽는 것.

두려워서 피하고 싶은 일을 한 번 시도해보는 것.

하기싫어 미뤄뒀던 집 정리를 하는 것.

화를 내고 싶은 순간 한 번 참아보는 것.

오랫동안 익숙해진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인정하는 것.

이런 사소한 선택들이 모두 자기 극복의 연습이 될 수 있다.


니체의 위버멘쉬를 철학적인 이상형으로만 으로만 보지 않고 일상으로 가져오면 오히려 아주 현실적인 인간상이 된다.


“나는 오늘의 나를 그냥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넘어설 것인가?”






노예 도덕에서 벗어난다는 것


니체가 비판한 ‘노예 도덕’도 일상적인 삶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내 삶의 기준을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남이 정해준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는 태도를 뜻한다.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남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니까.”

“부모님이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슬롯적으로 성공하려면 당연히 그래야 하니까.”


이런 생각 속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 자신의 생각보다 슬롯의 기준을 따라가게 된다.


좋은 온라인 게임을 가져야 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남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자식을 잘 키워야 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물론 이런 가치들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인지 묻지 않고 수용하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한 뒤 “이것은 내가 선택한 가치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남들이 가지 않는 길도 선택한다.

그러므로 위버멘쉬는 특별히 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남에게 넘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위버멘쉬(Übermensch)의

‘위버(Über)’는 ‘넘어서다’라는 의미다.

위버멘쉬는 남보다 높은 인간이 아니라 결국 자신을 넘어서는 인간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 자유로운 나.

어제보다 조금 더 용기 있는 나.

남의 평가에 덜 흔들리는 나.

내 삶의 선택에 조금 더 바카라임지는 나.

그리고 실패했더라도 다시 일어서는 나.


이런 사람이 니체가 말하는 초인에 더 가깝다.

그래서 ‘위버멘쉬’를 흔히 ‘초인’이라고 번역하지만, 오늘날에는 원어 그대로 위버멘쉬라고 부르는 것이 니체의 뜻을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니체는 인간의 정신이 변화하는 과정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라는 세 가지 모습으로 설명하는데 나는 니체의 이 비유를 좋아한다.


낙타는 “너는 ~해야 한다”는 말을 짊어지고 사는 존재다.


가족과 슬롯가 요구하고,

종교와 전통이 요구한다.


낙타는 묵묵히 그 짐을 진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나쁜 단계가 아니다. 배우고 견디는 시간도 인간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이 사자다.

사자는 낙타의 짐을 내려놓으며 외친다.

“나는 내 방식으로 살겠다.”

기존의 가치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하지만 사자에게도 한계가 있다. 기존 질서를 부수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새로운 삶의 가치를 곧바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어린아이가 등장한다.

아마도 나이들면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은 바로 우리가 단순-복잡-다시 단순의 단계를 살면서 대부분 자연스럽게 겪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니체가 말한 사자에서 어린아이가 되는 것은 저절로 되진 않는다. 어느 정도 성숙한 상태에서 이뤄진다고 본다.


어린아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 놀면서 규칙을 만들고, 실패하면 다시 시작한다. 과거에 지나치게 붙잡히지 않는다.

니체에게 어린아이는 창조와 긍정의 인간이다.

기존 가치를 부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제는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단계다.


나는 세상의 의무와 구속으로 부터 벗어난 은퇴 후가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아닐까 한다.
자기욕망에 충실한 단순한 어린아이처럼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저절로 오는 것은 아니고 온전히 낙타와 사자의 단계를 통과한 사람들에게 오는 선물일 것이다.




결론


신의 죽음은 기존의 절대적 가치가 무너졌음을 말한다.

그러면 인간은 허무에 빠질 수도 있다.

이때 필요한 힘이 힘에의 의지다.

그 힘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극복한다.


그리고 영원히 반복될지도 모를 삶까지 긍정할 수 있을 때 영원회귀를 받아들인다.

그 과정을 살아가는 인간의 이상적인 모습이 바로 위버멘쉬다.


그래서 니체의 철학은 결국 거대한 철학 이론이라기보다 삶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남들이 정해준 가치에만 기대지 말 것.

현실의 삶을 부정하지 말 것.

고통 때문에 삶 전체를 포기하지 말 것.

자신의 한계를 핑계 삼지 말 것.

그리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스스로 선택하고, 매일 조금씩 자신을 넘어설 것.


오늘 비가 와서 걷기가 싫은데도 우산을 들고 문을 나선다면, 그것 역시 니체적인 삶이다.

오늘의 나를 어제의 나와 똑같이 반복하지 않겠다는 작은 의지이기 때문이다.

결국 위버멘쉬는 어디 먼 곳에 있는 특별한 인간이 아니다.


내 삶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오늘의 나를 내일의 내가 조금 넘어서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니체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인간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덧)

니체의 노예도덕, 영원회귀, 반복과 허무주의를 보면서 불교의 무와 윤회사상을 비교해보았다.


니체와 불교가 만나는 지점


니체의 노예도덕을 보면서 니체의 생각이 불교와 만나는 지점이 있다 여겨졌다.


선불교에는 ‘살불살조(殺佛殺祖)’, 즉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과격한 표현이 있다. 물론 실제로 부처와 스승을 죽이라는 뜻이 아니다. 부처라는 관념과 권위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마저 넘어가라는 뜻이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부처의 말이나 형식에 다시 매달린다면 그것 역시 하나의 집착이 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니체가 말하는 ‘신의 죽음’과 흥미로운 평행을 이룬다.

니체 역시 인간이 신이라는 절대적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불교에서는 부처에 대한 집착마저 내려놓으라고 하고, 니체는 신에 대한 의존마저 넘어가라고 한다. 둘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대신해 삶을 결정해주는 권위에서 벗어나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도 있다.


불교가 궁극적으로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길을 강조한다면, 니체는 오히려 그 빈자리에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힘을 요구한다.

그래서 니체는 불교를 기독교보다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종교로 평가하지만, 동시에 고통과 욕망을 소멸시키려는 허무주의적 경향으로 해석하고 경계하기도 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니체의 철학이 선명해진다.

불교가 집착을 놓는다면, 니체는 삶을 창조하라고 한다.


불교적 관점에서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자유라면, 니체에게는 자신의 생명력과 창조성을 억압하지 않고 그것을 새로운 가치로 승화시키는 것이 자유다.


니체는 어쩌면 서양의 전통 안에서 불교와 비슷한 질문을 던졌지만, 다른 결론을 선택한 사상가라고 할 수도 있다.

“모든 집착을 내려놓아라.”

여기까지는 불교와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니체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리고 이제 그 빈자리에 네가 새로운 삶을 창조하라.”

이것이 니체의 힘에의 의지이고, 자기 극복이며, 궁극적으로 위버멘쉬다.


따라서 위버멘쉬는 단순히 신을 부정하는 인간도 아니고, 슬롯 규범을 무조건 거부하는 인간도 아니다.

그는 한 번 더 묻는 인간이다.


“내가 지금 따르고 있는 가치가 정말 나의 가치인가?”


그 과정에서 부모의 가치도, 슬롯의 가치도, 종교의 가치도, 심지어 한때 자신이 신봉했던 철학까지도 다시 바라본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부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사자처럼 기존의 가치를 깨뜨린 뒤, 어린아이처럼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


이 점에서 ‘살불살조’라는 선불교의 표현은 니체를 이해하는 데 재미있는 비유가 될 수 있다.

부처에게 의존해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마저 넘어서는 것.

신에게 의존해서 선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의 권위마저 넘어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는 것.

결국 둘 다 우리에게 익숙한 권위에서 한 발 물러나라고 말한다.


다만 그 이후의 길은 서로 다르다.


불교는 내려놓음과 깨어남을 향하고,

니체는 자기 극복과 창조를 향한다.


그리고 니체에게 인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남이 만들어준 의미를 빌려 살지 않는 것.

자기 삶을 스스로 해석하는 것.

어제의 나를 오늘 조금 넘어서는 것.

그것이 니체의 위버멘쉬다.


오늘 조금 더 자유로운 나,

오늘 조금 더 나다운 나.


어쩌면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는 바로 그런 작은 순간들 속에서 태어나는 인간일 것이다.


남의 신을 대신 살아주는 인간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창조하는 인간으로.
그 길이 니체가 말한 자기 극복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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