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

시스템의 심연에서 발견한 ‘하지 않을 능력’

by도윤


인류는 탁 트인 광활지에서 생존을 건 경쟁을 벌이며 진보해왔다. 그 투쟁의 대상은 때로 거친 자연이었고, 때로는 침략자나 이념, 혹은 견고한 체제 그 자체였다. 오랫동안 인류의 흐름을 이해하는 열쇠는 ‘외부적 조건’에 있다고 믿어왔다. 자본주의와 국가, 그리고 돈이라는 구조를 어떻게 설계하고 통제하느냐에 따라 인류의 부가가치와 정의(justice)가 결정될 것이라 낙관했기 때문이다. 메모장에 빼곡히 적힌 질문들은 늘 체제와 구조를 향해 있었다.


그러나 ‘앱스타인 사건’이라는 거대한 균열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이 견고한 세계관은 충격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것은 이념의 대립이나 혁신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모순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구조와 체제 밖으로 나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어두운 욕망의 현실화였다. 욕망이 자본과 인프라를 만나 ‘현존’하게 된 풍경 앞에서, 질문의 방향은 급격히 꺾였다. 체제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가 아니라, 체제 안에서 작동하는 ‘인간의 욕망’ 자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시스템에 도덕적 안전장치를 기대하며, 앱스타인 같은 비극을 시스템의 결함이라 부른다.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일지도 모른다. 시스템의 본질이 욕망의 실현과 효율에 맞춰져 있다면, 이 사건은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시스템이 지나치게 충실하게 작동한 결과다. 자본과 권력이 욕망을 가장 효율적으로 해소하는 도구가 되었을 때, 안전장치는 처음부터 시스템의 본질과 양립할 수 없는 장식에 불과했다. 결국 욕망은 시스템의 하위 요소가 아니라, 시스템을 만들고 움직이는 동력 그 자체였던 셈이다.


여기서 절망적인 순환에 빠진다. 괴물 같은 욕망을 분리해내려는 시도조차 또 다른 종류의 욕망—질서를 세우고 통제하려는 욕망—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외부적 조건인 GDP와 기술은 번영의 수치를 높였지만, 역설적으로 그 번영은 내부적 조건인 뒤틀린 욕망이 자라날 더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외부적 조건은 설계하고 수정할 수 있지만, 인간 내부의 욕망은 설계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조르조 아감벤이 소환한 ‘바틀비’의 목소리를 빌려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부능(不全, Impotentiality)의 선언이다. 시스템이 우리에게 모든 잠재력을 끝까지 실현하라고, 네가 가진 모든 자본과 기술로 욕망의 끝을 보라고 강요할 때,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기로 선택하는 힘’은 그 폭주를 멈출 유일한 브레이크가 된다.


욕망을 거세하거나 완벽한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욕망이 실현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의 문턱에서, 인간이 자신의 역량을 ‘쓰지 않음’으로써 보존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앱스타인의 욕망과 우리의 불편한 정의감 사이의 간극은, 아마도 이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느냐 아니냐의 차이에 있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광활한 외부를 정복해온 기록이라면, 앞으로의 과제는 내부의 심연 속에서 이 ‘멈춤의 역량’을 어떻게 발굴하느냐에 달려 있다. 욕망은 단일한 엔진일지 모르나, 그 엔진을 끄거나 잠시 멈춰 세울 수 있는 권한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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