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엄마에게 물은 적이 있다.
죽는 게 뭐야.
이제는 조카가 같은 질문을 한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죽음을 설명해 왔지만, 누구도 자기 죽음을 경험해 말할 수는 없다. 살아 있는 자는 죽음을 알 수 없고, 죽음을 지나간 자는 그것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늘 그 경계 바깥에서만 죽음을 사유한다. 어쩌면 죽음은 끝내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죽음을 이해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죽음과 자신의 상실을 통해서만 그것에 접근한다. 죽음 자체보다 먼저 도착하는 것은 언제나 부재의 감각이다. 오래도록 죽음을 생각하는 일이 삶을 더 깊게 만든다고 믿어왔다. 죽음을 의식하는 사람만이 삶의 유한성을 통과해 현재를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죽음을 지나치게 응시하는 일은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 장을 너무 일찍 펼쳐 본 사람은 현재의 시간을 충분히 살아내기 어려워진다.
사랑의 크기는 결국 상실의 크기가 된다. 사랑은 서로를 가장 깊게 연결하면서 동시에 가장 깊은 상실의 가능성을 만든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죽음을 품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언젠가 그 사람을 잃을 가능성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밥상 앞에서 아이가 묻는다.
“엄마는 죽으면 뭐가 될 거야?”
엄마는 웃으며 말한다.
“나는 바람이 될래.”
“왜?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잡을 수도 없잖아.”
“그래야 언제 어디서든 네 두 뺨을 어루만질 수 있지.”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아빠 왜 울어?”
“바람이 눈에 들어갔나 봐.”
그 장면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죽음을 소멸이 아니라 관계의 지속으로 이해하는 방식, 육체는 사라지더라도 누군가는 여전히 타인의 감각 속에 남는다.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기억과 애도의 형태로 계속 존재한다. 생각해 보면 “너를 세상에 불러들인 건 나의 이기심이었어”라는 문장 역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알면서도 또 다른 생명을 세계 안으로 불러들인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닮은 존재를 만나보고 싶다는 바람, 그러나 그 바람은 필연적으로 미안함을 동반한다. 나의 시간은 너보다 먼저 멈출 테니까.
그 문장은 자기 자신과 남겨질 타인을 동시에 향한다. 인간의 사랑에는 언제나 비대칭적인 시간이 내포되어 있다. 함께 살아가더라도 결국 누군가는 먼저 떠나고, 누군가는 남겨진다. 사랑은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경험이면서 동시에 서로 다른 끝을 향해 걸어가는 일이다.
할아버지의 바카라 앞장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여러 가지 형태로 찾아오는 해답에 마음을 열어두라
부고를 받았을 때, 내가 오래 붙들고 있던 죽음에 대한 사색은 아무런 힘도 되지 못했다. 죽음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문장들은 실제 상실 앞에서 쉽게 무너졌다. 사유는 삶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지나간 부고는 뒤로 흘려보내고, 아직 오지 않은 부고는 미리 불러오지 않으려 했다. 세월의 무상함 속에 몸을 맡긴 채 생각으로부터 조금 멀어지고 싶었다.
그런데도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추석날 손주들을 바라보며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던 할아버지의 얼굴.
어쩌면 해답은 처음부터 언어의 형태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삶을 설명하려 하지만, 삶의 가장 중요한 진실들은 어떤 표정, 어떤 기억, 두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으로 다가온다. 어떤 질문은 이해를 통해 해결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만 천천히 받아들여지기에 조카의 질문 앞에서 예전처럼 쉽게 답하지 못한다.
만화 출처 : https://www.instagram.com/p/DVhsxbjjzEJ/?utm_source=ig_web_copy_link&igsh=MzRlODBiNWFlZ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