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TV 할아버지

이제 은퇴하세요

우리집엔 아주 오래된 모니터가 하나 있다. 티비에 관심이 없어서 이 물건을 대체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는데, 남편과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남편 집에 있었다. 이걸로 티비도 보고 컴퓨터 모니터로도 보고 했었다.

아이들이 있기 전에는 이걸로 넷플릭스나 클래식 방송을 보기도 했는데, 아이들이 있고 나서는 도통 티비 볼 시간이 나지 않아 그대로 티비를 안 본지 아이들 나이만큼 된 것 같다.


아이들에게 티비를 언제 보여줘야 할 지 고민을 전혀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물론 답이 있는 건 아니다.

나는 이 아이들에게 세 돌은 지나서 티비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도 슈퍼심플송 같은 영어노래만 조금씩. '영어노래만' 이라는 기준은 딱히 내 의지로 정해진 게 아니었고 그냥 대부분 그렇게들 하시는 것 같아서였다.

그러다 세 돌을 넘기지는 못하고 32개월에 처음 오케스트라 음악부터 보여주었다. 이유는 그냥 내가 듣고 싶어서.


라데츠키 행진곡을 처음 틀어줬는데 박수를 치는 부분에서 아이들과 다 같이 박수를 치며 며칠을 즐거워했다. 꽤 오랫동안 아이들이 라데츠키 행진곡을 즐겨주었다. 그러다가 꽃의 왈츠로도 넘어가보고 볼레로도 들어보고 여러가지를 아이들이랑 같이 들어보았다.

그 무렵, 어린이집에서 한글 관련 영상 보는 걸 즐거워했던 아이들은 그걸 집에서도 보고 싶다고 말했고, 틀어주자마자 반응이 굉장했다. 나름 색감이 차분한(?) 오케스트라 공연 영상에서 매우 컬러풀한 영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영어노래도 노출해주니 아이들이 즐거워했다. 슈퍼심플송을 처음 보여줬는데 어쩌다 알고리즘에 코코멜론이 올라와 아이들이 그걸 또 놓치지 않고 보고 싶다고 해서 틀어주었더니 난리가 났다. 슈퍼심플송보다 움직임이 조금 더 있고 또 그림이 다채로우니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 뒤로 아이들은 한동안 영어노래에 푹 빠져 하루 30분 정도를 즐겨 봤다. 그러다 집에서 읽는 그림바카라을 유튜브로도 찾아 보여줄 수 있어서 그런 것도 꽤 보여주었다. 점점 시간은 20분에서 30분, 40분, 많이 보면 50분까지도 보게 되었다. 점점 마음이 복잡해졌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티비를 보는 그 시간엔 정말이지 아무런 미동도 대꾸도 없이 오로지 티비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오전 등원준비가 너무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아이들 먹을 걸 챙겨주고, 그걸 다 먹으면 자유놀이를 하고 싶어하는데 그 시간에 마침 등원준비를 바로 이어 해야 하기 때문에 매일이 전쟁 같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10분동안만 티비를 보여주면 한 아이당 5분씩 준비를 끝마칠 수 있겠구나'였다. 내 계산이 맞았다. 5분동안 옷을 입히고 머리를 빗기고 로션을 발라주고 영양제를 먹일 수 있었다. 후다닥 끝내기엔 좋았지만 어쩐지 그렇게 하면 할 수록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이들을 챙겨주는 그 시간에 마치 난 인형한테 옷을 입히고 머리를 빗겨주는 것 마냥 아이들의 반응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눈과 귀가 티비에 다 집중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과감히 오전 티비를 없앴다. 아이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티비는 너희들을 저녁에만 만나고 싶대"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로 겨우 무마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아이들은 티비를 저녁에만 시청했다. 영어노래를 주로 틀어주다가 '애들이 노래와 그림이 재밌어서 화면에 집중을 하는건지, 그냥 티비 화면이니까 집중을 하는건지' 알 수가 없어서 아이들이 잘 알아듣고 재밌어 할 수 있는 컨텐츠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 중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엄마까투리였다. 나도 아이들이 볼 때 같이 시청하면서 옆에서 몇마디 거들곤 했는데, 확실히 엄마까투리를 틀어줄 때 내용을 이해하고 재밌는 부분에서는 깔깔 웃는 횟수가 많아졌다. 그래, 영어노래는 그냥 노래로서만 들려주자. 슈퍼심플송을 유튜브로 보고 듣는다고 영어가 좋아질 것 같으면 영어가 힘든 아이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혼자 이런 생각을 하며 아이들이 티비시청을 하는 시간엔 아이들이 좋아하는 컨텐츠를 틀어주었다.


티비를 볼 때는 조용하고 나도 미처 끝내지 못한 집안일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러다 아이들은 점점 티비를 끌 시간이 되면 짜증을 냈다. 몇 번은 어르고 달래서 티비를 껐지만 그게 계속되니 나도 슬슬 화가 나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티비시청시간을 과감히 없애기로 했다.

"티비 고장났어. 이제 티비 못 봐."

아이들은 꽤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한 일주일을 잘 버텨주어서 아빠가 티비를 고쳤다는 얄팍한 거짓말을 하며 다시 티비를 보여주었다. 아이들이 티비를 보는 그 시간이 내가 잠깐이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마음은 불편했지만 스스로가 '어쩔 수 없다'는 속임수를 써가며 아이들에게 그렇게 티비를 허용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원에서 크게 싸웠다는 이야기를 선생님께 전해듣고 나서, 우리집 티비가 다시 고장났다고 거짓말을 했다.

"우리집 티비는 왜 이렇게 자주 고장나요?"

야야가 이해 안 간다는 듯 물어보았다.

"우리집 티비는 엄마아빠 결혼하기 전부터 아빠 집에 있었던 티비야. 아주 나이 많은 할아버지야. 편찮으시니까 쉬게 두자."

대신 아이들에게 화면 대신 그 동안 봐 왔던 영상을 귀로 듣게만 했다. 그렇게 들려주기만 하니 한 20분 정도를 아이들이 꽤 집중해 주었다. 그러다가 점점 들으며 가위놀이를 한다든지 스티커북 놀이를 한다든지 멀티플레이(?)를 하더니, 지금은 아예 듣지 않는다. 틀어줘도 그냥 아이들 할 것에 집중을 해주고 있다.


32개월부터 40개월까지 약 8개월동안 아이들은 다양한 영상을 보았다. 나는 그 시간에 내 할 일도 하고 앉아서 짧게나마 일기도 쓰고 바카라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왠지 모르게 늘 불편했다. 마치 내 시간을 유튜브 영상으로 사는 느낌이었다. 나는 잠깐이나마 편했고, 아이들도 재밌었겠지만 그 티비만 보는 시간들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는 티비를 고쳤다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종종 야야가 "티비 보는 건 재밌고, 노는 건 재미없어."라는 어이없는 말을 한 전적(?)도 있었고, 이미 모니터에 아이들 그림을 테이프로 붙여놨기 때문에 우리집 티비는 이제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티비를 주로 보던 저녁 시간에 아이들은 거실을 심심하게 뒹굴든, 둘이 얘기를 하며 놀든 어쨌든 시간을 보낸다. 심심하다면 알아서 놀거리를 만들겠지, 생각하며 나도 조금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다. 내가 불편하니까 아이들 말수가 많아졌다. 그래서 내 귀가 매우 피로하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10년도 넘으신 티비 할아버지, 앞으로 일은 시키지 않고 그냥 잘 모시기만 하겠습니다.

은퇴하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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