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한 한 방울

by박정옥

고소한 한 방울



국수 한 줌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서 양을 조정하고 팔팔 끓는 물에 삶았다. 지난겨울에 담근 동치미 국물을 꺼내서 국수 대접에 부었다. 휙 휘저어서 국물을 마시고 국숫발을 젓가락으로 감아올렸다. 혼자라고, 귀찮다고, 끼니를 이렇게 해결하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몸을 일으켜 오이채와 김 한 장을 뜯어 올리고 조금 남아 끈적해진 참기름 한 방울을 넣었다. 고소한 냄새가 장마의 무게에 눌려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온 집안을 기웃거린다. 국수를 먹다 말고 고소한 향을 따라 엄마를 떠올려본다.


더 나은 삶을 살아보려고 허위단심한 옥이 엄마였다.

5월이 되면 참깨를 심기 위해서 흙을 잘게 고르고 이랑의 골을 깊게 파서 배수가 잘되게 한다. 풀 한 포기 없이 말간 맨살의 두둑에 살짝 구멍을 뚫고 깨알을 몇 알씩 넣는다. 씨앗은 컴컴한 땅속에서 온 힘으로 꿈틀거린다. 장마가 오기 전에 떡잎이라도 밀어 올려야 햇살의 힘을 빌릴 수 있다. 지렁이가 흙살을 들쑤시며 꾸물꾸물 지나간다. 홑이불처럼 얇게 덮여있던 겉흙이 부서져 내리고 밭둑에서 종종거리던 새 한 마리 눈치 빠르게 날아온다. 흙덩이 아래 깔려있던 깨알만 새 부리의 변을 면했다.

나는 졸지풍파 속에 살아남은 깨알이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머리를 내밀고 보니 긴 이랑에 초록색이 점점이 박혀있다. 쌀알보다 작았던 씨앗들이 새로운 꿈을 꾸며 세상에 나온 날이다.

부지런히 햇살을 유혹하고 이슬 받아먹으며 두어 뼘 자라고 나니 장마가 시작되었다. 뜨거운 볕에 지쳐있다가 처음 비를 맞을 땐 좋았다. 온몸이 촉촉해지며 잎이며 줄기에 물이 돌기 시작했다. 곧 줄기가 더 자라고 꽃대가 생기고 꽃받침이 열릴 것 같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비는 계속 오고 몸은 더 무거워졌다. 축 늘어진 잎을 들어 올릴 힘이 없어 아랫잎이 물에 잠겨 녹아내렸다. 잎이 있어야 태양을 끌어당길 힘이 생기는데…….

비가 더욱 세차게 내리자, 옥이 엄마가 비료 부대를 세로로 잘라서 머리에 덮어쓰고 밭에 나왔다. 끝이 닳은 호미로 밭고랑이 물고랑이 되지 않게 “쏴악 쏴악” 깊게 파서 물길을 열었다. 흠뻑 젖은 몸뻬(바지)를 추켜올리면서 하늘을 보며 한마디 한다.

“이놈의 비가 엔간히 오고 말아야지. 깨 농사 다 망치겠다. 깨는 장마보다 가뭄이 더 낫지.”

다음 날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햇볕이 쨍쨍하다. 힘들긴 했지만 살아남았다. 짓물러져서 결국은 일어나지 못한 친구도 있었다. 훌쩍 자란 키와 무성한 잎새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줄기의 간지러움이 예사롭지 않은 것이 아마 꽃대가 나오려나 보다. 헤실헤실 웃음이 난다. 칠월 말이었지 싶다. 여리여리한 몸피에서 종을 닮은 연분홍색, 아니 연보라색 같기도 한 꽃이 배시시 층층이 달려 있다. 꽃잎이 하늘거리니 나비들이 와서 수작을 부리고 간다. 저것들이 예쁜 것은 어찌 알고……. 곧 아기들을 잉태할 것 같다.

기쁨도 잠시 ‘엄마야, 이게 뭐꼬?’ 가장 튼실한 이파리 위에 손가락만 한 벌레가 꾸물꾸물 기어 다니며 잎을 갉아먹는다. 친구 깨순이도 당했다. 이러다 아기집마저 먹히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바람의 힘을 빌려 힘껏 흔들어도 떨어지지 않고 딱 붙어있다. 얼마나 잎사귀를 갉아먹었는지 온몸이 초록색으로 번들거린다.

좀 전에 다녀간 옥이 엄마가 시커먼 비닐봉지를 들고 왔다. 진절머리 나는 저것들 없애는 약이라도 뿌려줄 줄 알았는데, 비닐봉지만 들고 오다니 실망스러웠다. 팔월의 뙤약볕도 아랑곳없이 옥이 엄마가 내 옆에 엉거주춤 엎드린다. 그러곤 징그럽게 꾸물거리는 벌레를 맨손으로 잡아서 시커먼 봉지에 담으면서 중얼거린다. ‘요놈의 깨 벌레, 씨앗이 생기는데 약을 칠 수는 없지만 그냥 둘 수도 없지.’ 난 그 모습을 존경의 눈빛으로 봤다. 그렇게 며칠을 애쓴 옥이 엄마 덕에 벌레는 거의 없어지고 씨방은 투구처럼 단단해져 갔다.

날씨는 아직 덥지만, 며칠 전부터 간간이 찾아오던 소슬바람 때문인지, 청청하게 빛나던 잎들이 자꾸 까칠해지고 아래쪽에 먼저 맺었던 씨방 속에서 난리가 났다. 견디다 못한 씨방이 벌어지고 하얗고 좁쌀보다 작은 씨앗들이 튀어나왔다. 마지막으로 꽃을 피웠던 막내는 아직 여물지도 못했는데. 멀리서 옥이 엄마 목소리가 들린다.

“여보, 갑빠부터 깔아놓고 깻단을 세워야 해요.”

언제 왔는지 옥이 아버지가 바지게 올린 지게를 지고 시퍼렇게 날 세운 조선낫을 들고 밭둑에 서 있다. 벌써 구월이 되었나 보다.

그날, 우리는 태어나고 살았던 곳을 떠나 푸르뎅뎅하고 낡은 천막 천 위로 이사를 했다. 며칠을 뜨거운 햇살과 바람을 만나고 밤엔 달빛과 속닥거리다 보니 단단하던 씨방이 조금씩 벌어졌다. 볕이 좋은 날 옥이 엄마가 나를 거꾸로 들고 작달막한 막대로 탁탁 두드릴 때 “좌르륵 좌르륵” 쏟아지는 깨알들, 깨 볶는 냄새보다 더 고소한 소리였다. 야무지게 익은 낱알이 되었다는 기쁨에 작대기로 맞는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 한 꼬투리에 있었지만, 누군가는 다음을 위한 씨앗으로, 누군가는 고소한 참기름 한 방울로 승화되겠지. 나를 키워주고 지켜주느라 진이 빠지고 말라버린 겉대는 불쏘시개가 되어 뜨겁게 생을 마칠 것이다.

가을걷이가 모두 끝나고 간밤에 서리가 내렸던 날이다. 옥이 엄마는 찔레꽃처럼 환한 낯꽃을 하고는 나의 하얀 속살을 씻고 또 씻어서 방앗간으로 가져갔다.

“올해는 우리 깨가 참 좋네. 기름 좀 짜 주소. 서울에 있는 딸에게 보내려고 하니 꼬소하게 짜주소.” 이 소리를 마지막으로 듣고는 뜨거운 불판 위에서 어지럽게 돌다가 쇠로 된 기름틀에 들어갔다. 무거운 눌림 판에 짓눌려 마지막 진액 한 방울까지 다 쏟아냈다. 깻묵은 밭의 거름이 될 것이다.


해마다 참기름 들기름 고춧가루 통깨 등이 택배로 왔다. 상표가 붙은 농산물을 사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엄마표고 당연한 듯이 받아먹었다. 우리를 키우고 살아내느라 한 알의 깨처럼 일생을 보냈을 엄마다. 사라지는 기억 속에서도 온 정신을 모아서 “예쁜 옷 입어라. 흰머리 염색하라.”며 베갯잇 속에 감춰둔 지폐를 꺼내 주었다.

냉장고 문안에 서 있는 소주병에는 엄마가 짜 주신 마지막 참기름이 조금 남아 있다. 그 속엔 엄마의 사랑뿐 아니라 엄마의 외로움도 있었다는 걸 이제야 느낀다. 고마웠다고 많이 사랑한다고 안부를 전하고 싶지만, 전할 방법이 없다. 볼 수 없어서 더 보고 싶다.

저녁밥을 대신한 국수에 엄마표 참기름 한 방울이 나를 위로하는 저녁이다.




선수필 2026년 가을호에 실음

작가의 이전글문학의 성지 생 제르맹 데 프레 골목과 프로코프식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