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를 전합니다.
봄인가 했는데 여름입니다. 그곳은 어떠한지요?
오늘 인터넷에서 ‘햇복숭아 판매’란 글을 보았습니다. 복숭아는 우리가 좋아하던 과일이라 당신 생각이 났습니다.
나에게 언제부터 복숭아를 좋아했는지 물은 적이 있었죠. 복숭아 맛을 알게 된 건 초등학생 때였습니다. 여름 방학을 맞아 30여 리 떨어져 있는 외가에 처음으로 혼자 갔던 날, 외가 식구 모두의 환대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친 다리를 풀고 하룻밤 자고 난 아침, 이모와 외삼촌을 따라 산비탈에 있는 복숭아밭으로 갔어요. 막 깨어난 아침햇살은 복숭아 뺨을 더 붉게 물들이고 나뭇가지와 잎새 사이를 지나며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새벽에 내렸던 이슬은 갸름한 복숭아 잎새 뒤에 숨어 사라지기 전인 그런 시간이었어요. 삼촌은 크고 잘 익은 복숭아 한 알을 따서 수건에 쓱쓱 문지르더니 나에게 내밀었습니다.
“함 묵어봐라.”
복숭아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아삭 깨물었을 때 새콤하며 달콤하던 그 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을 만난 후 당신도 복숭아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기뻤어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좋아하는 것이 같다면 충분히 행복을 엮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과일을 좋아하는 것이고, 특히 복숭아를 좋아했죠. 가난하던 우리지만 여름이면 집에 복숭아가 떨어지는 날이 없었죠. 다행히 우리 아이들도 복숭아를 좋아했지요. 친지나 친구 중에는 복숭아털 알레르기 때문에 복숭아를 안 먹는 사람도 있었는데 복숭아 맛을 즐기지 못하는 그들이 불쌍하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죠.
우리가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당신은 승진을 위해, 아이들은 대학 초년 생활 하느라 정신이 없었죠. 일 년에 한 번 있는 여름휴가, 매년 회사에 반납하던 당신이 그해는 고향을 다녀오자고 했죠. 그때는 여행이라는 걸 따로 해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부모, 형제를 만나고 오는 짧은 여정 끝에 고속도로로 달리다가 국도로 빠져 장호원으로 갔습니다. 우리가 왜 그곳으로 갔는지 기억나죠. 그곳 복숭아가 유명해서 가보고 싶었던 곳이죠. 복숭아는 맛도 종류도 많지만, 우린 이름이 중요하지 않았고 딱딱이, 말랑이, 백도, 황도 정도로도 충분히 맛을 즐겼잖아요.
해는 저물어 어스름하고 그때만 해도 포장되지 않은 국도는 흙먼지 풀풀 날리던 길이었죠. 길가에 천막을 쳐서 가게를 내거나 대로변에 나앉은 농부들이 복숭아를 팔고 있었죠. 우리는 잘 익은 복숭아 한 상자를 사서 천천히 그곳을 벗어나려 할 때 허리 굽은 할머니의 손짓을 보았습니다.
“너무 익어 내일이면 팔 수 없다. 싸게 가져가소.”
누런빛을 띤 복숭아 앞에서 멈칫거리던 우리는 커다란 대야에 담긴, 두 상자는 족히 넘어 보이는 할머니의 복숭아를 안 살 수가 없었습니다. 수확하고 며칠 지난 것이 아니고 일손 부족으로 밭에서 농익은 복숭아였어요. 집에 도착할 때까지 참지 못하고 차 안에서 껍질을 벗겨 단물 뚝뚝 흘리면서 먹었던 복숭아, 당신도 생각나죠?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단물을 입술로 닦던 당신 모습이 선합니다.
집에 와서야 복숭아를 너무 많이 샀다는 걸 알았습니다. 일부는 냉장고를 정리하여 넣고 일부는 실온에 보관한 복숭아는 우리 식구가 매일매일 먹어도 일주일 넘게 먹을 수 있었죠. 그때의 황도가 얼마나 맛있던지, 우린 복숭아 철만 되면 그때 그 복숭아 이야기를 꺼냈죠. 그 이후 그만큼 맛있는 복숭아를 먹지 못했습니다.
당신과 마지막으로 복숭아를 먹었던 건 당신이 입원해 있을 때 지인이 사다 준 황도 한 상자였죠. 당신은 그때 두어 조각을 먹고 더는 먹지 못했습니다.
당신 기일에 복숭아를 올리고 싶은 생각이 참 많이 나지만 복숭아가 혼으로 오는 그 길을 방해한다기에 그냥 참습니다. 미신이라고들 하지만 그날은 온전히 나와 아이들 곁에 다녀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간절해서요,
작년에 장호원에 사는 지인을 알게 되어 장호원 황도를 부탁했어요. 알이 굵고 잘 익은 황금빛 나는 복숭아였어요. 달콤한 맛과 향내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옛날 우리가 함께 장호원 길에서 샀던 그 복숭아 맛은 아니었어요.
나는 해마다 여름이면 황도가 더는 나오지 않을 때까지 복숭아를 사겠죠.
당신 간 지 10년이 훌쩍 넘었네요. 당신 떠나기 일주일 전에 태어났던 그 손주 녀석이 누굴 닮았는지, 보고 또 봐도 잘 생겼답니다, 녀석도 복숭아를 좋아하는데, 요즘은 사춘기라 할미를 반가워하지도 않습니다. 혼자 살 거라고 큰소리치며 속을 태우던 큰아이도 짝을 찾아가고 이제 오롯이 나뿐입니다.
혼자서 한강으로 흐르는 천변 산바카라을 자주 합니다. 그 길에 갯버들과 뽕나무와 찔레, 이름 모르는 잡초와 함께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봄이면 천변을 환하게 밝히는 복사꽃이 사람 마음을 분홍으로 물들이지요. 그 옆을 지날 때면 젊은 날 우리가 밤새워 읽던 『삼국지』의 도원결의도 생각나고 김용의 『사조 영웅전』에 나오는 황 약사의 도화도도 떠오릅니다. 복숭아를 좋아해서 그런 소설의 무대가 기억나는지 당신과 함께했던 세월이라 가슴에 남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곳에도 도화 붉게 피고 향기로운 복숭아가 주렁주렁 달려있겠죠. 당신의 식탁에도 어김없이 맛있는 복숭아가 올라오겠죠. 그러하길 믿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면서 엮었던 수많은 추억이 있어 혼자지만 잘 살고 있습니다. 부디 당신도 그곳에서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살면서 아릿한 추억 하나 가슴을 두드리면 그때 또 안부를 전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