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뵈는 게 없던 날

by김분주

눈이 너무 나빠졌다.


나는 시력이 꽤 나쁜데도 평소에는 안경을 잘 쓰지 않는다. 버스 번호가 안 보이는 불편보다 안경을 쓰는 불편이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이닉스가 추락하듯 내 시력도 바닥을 향해 끝없이 곤두박질치는 기분에 눈이 불편해져 계속 미루고 또 미루다가, 휴가를 받은 김에 안과를 찾았다. 안구에 바람도 쏘고, 사진도 찍고, 이것저것 검사를 한 뒤 마지막으로 시력검사를 했다.

왼쪽을 가리고 오른쪽 눈으로 보는데, 지난가을 안경을 맞출 때보다 눈이 더 나빠졌다는 게 바로 느껴졌다.

간호사 선생님이 손으로 가리키는 숫자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0.5.

0.4

0.3

일초 이초 흐를수록 숫자의 형태는 사라지고 흰 바탕 속 검은색 아지랑이로 보였다. 고개를 갸웃하는 간호사 선생님의 표정을 보니, 내 시력이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했다. 몸무게는 낮을수록 신나는데 시력은 낮을수록 절망스럽다.



"이번에는 오른쪽 눈 가리실게요."


그 말을 듣고 가리개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기는 짧은 찰나에 나는 사력을 다해 두 눈으로 시력표를 훑으며 0.3 아래 숫자를 미친 듯이 외웠다.

부정행위라기보다는... 생존본능이었다.

오른쪽 눈을 가리고 왼쪽눈에 신경을 집중해 봤지만 숫자는 여전히 흐릿했다. 그래도 동물적인 감각으로 하나씩 찍어 맞췄다.

많이 맞춘다고 상을 주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다. 그 순간만큼은 숫자 하나를 더 맞히는 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이었다.

마지막일듯한 간호사선생님의 지휘봉 끝에 시선을 집중하여 지목된 숫자를 봤다. 내가 외운 부분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3.
그런데 내 눈에는 8로 보였다.


3이냐.
8이냐.

어릴 때 비싼 돈 주고 배운, 기억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던 연상기억력을 믿을 것인가.
초등학생 때 억지로 다닌, 빠르고 정확하게 읽어내는 걸 배운 속독학원을 믿을 것인가.

기억을 믿을 것인가.
눈을 믿을 것인가.


연상기억력학원인가.
속독학원인가


뇌!!!!!

눈!!!!!!!


ㅅ..ㅏ... 삼.. 아니..ㅍ.. 파..ㄹ 팔!!!!

으아아아ㅏㅏㅏㅏㄱㄱㄱ




에라. 결심했다.
보이는 게 진실이다.


파아아알!!!!!!

소인은 관심법으로 보았느니라.



간호사 선생님은 말없이 작대기를 내렸다.

그리고는 많은 환자에 이미 지쳐버린 영혼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실제말: 눈이 굉장히 나쁘시네요.

속마음: 눈뜬 장님이시네여.




0.1 당첨이요.




정답은 6이었다.

눈에 뵈는 게 없는 사람. 그게 나였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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