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같은 진담

by킹스톤

오랜만에 저녁식사를 하며 텔레비전을 켰다.

뭘 볼까 고민하던 나와 아내는 예능 프로그램 속 한 장면에 이끌려 재생 버튼을 눌렀다.


<36년 만에 첫 시상식>

'유승목'이라는 배우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화면에 등장했다. 그는 배우 생활 36년 만에 처음 상을 받았다며 감격스러웠던 그날을 떠올렸다.


"62회 백상 예술 대상, 드라마 부문 남자 조연상!"

"<서울자가의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이야기> 유승목 님 축하드립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울컥하는 마음을 간신히 부여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꽃다발과 상패를 꽉 거머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담담한 척 입을 열었다.


"모든 시상식을 통틀어서 후보로 오른 게 이번이 처음입니다."


관객들의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동료 배우들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작품을 함께한 모든 이들과 수상의 기쁨을 나눈 그는, 유머도 빼놓지 않았다.


“이 상 받았다고 건방 안 떨 테니까 계속 불러주십시오.”


그 말에 관객들이 잠깐 방심한 사이, 아내를 향한 진심 어린 마음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정말 고생 많이 하면서 지금까지 연기할 수 있게 옆에서 묵묵히 지켜봐 준...

은희야.... 고마워... 이 상은 당신 거야... 감사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음식을 삼키던 내 식도가 잔뜩 움츠러드는 것 같았다. 눈을 껌벅껌벅거렸다. 애써 태연한 척하다가 눈이 마주친 아내도 껌벅대고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텔레비전에 눈을 떼지 못한 채 훌쩍댔고, 아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바라봤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뿐이었다. 감동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내 머릿속은 온통 '36'이라는 숫자로 가득 차고 있었다. 36년 만이라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까지 무려 36년이나 걸렸단 말인가. 그렇게나 오래?

이런 젠장.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건 나밖에 없나 봐."


나는 아내에게 농담을 진담처럼 내뱉고 말았다.

나에게도 36년, 아니 그 이상의 긴 세월을 견뎌낼 만한 열정이 남아 있는 건지 의문스러웠다. 나는 과연 내 마음 한편에 고여 있는 이 불안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

사실 환승 이후 사그라들 줄 알았던 불안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있어 창작이란 것은 치유를 넘어 투쟁에 가까운 행위였다. 죽을힘을 다해 살고자 했다. 하지만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지쳐만 갔다.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었다. 어차피 죽는 건 매한가지일 테니까.


그래서였을까. 나는 무섭고 불안한 마음을 아내에게 그런 식으로 내뱉고 만 것이다.


"그런 생각하지 마.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아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이사도 했고, 글도 쓰고 있고, 바카라도 나오잖아."


내가 무슨 말을 이어가야 할지 고민하던 사이, 어린 아들이 선수를 쳤다.


“바카라? 아빠가 바카라을 썼어?"

"어... 그렇긴 한데 조금 민망하네..."


아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음... 아빠 글 실력이 아직 바카라에 실릴 만큼은 아닌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럽다고 해야 하나..."

“그게 왜?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 말은 내가 평소에 아들에게 자주 해주던 말이었다. 한 번에 완벽할 수는 없다고. 실패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거라고. 내가 하던 잔소리를 그렇게 되돌려 받으려니 헛웃음이 났다.


“바카라 제목이 뭔데?”

"음... 제목은 <우리가 만난 환승역>. 아빠를 포함해 26명의 작가님들이 한 편씩 글을 써서 낸 바카라이야."

"환승역? 그게 뭐야?"

"역은 기차가 서는 곳을 말하고, 환승은... 기차나 버스를 갈아타는 걸 말해."


아들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환승이라는 말에 담긴 뜻도 알게 되겠지.


"바카라 하나 나왔다고 건방 떨지 않을 테니 계속해서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다행히 아들은 깔깔대며 웃었고, 그 모습에 아내와 나는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웃고 말았다.




스물여섯 명의 온라인카지노 작가들이 '환승'을 주제로 저마다의 이야기를 글로 썼다.

드디어 그 이야기들이 한 권의 바카라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내 글이 실렸다는 게 아직도 얼떨떨하다.


그래. 아들 말이 맞아. 언제 이렇게 컸을까.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지. 아빠의 첫걸음을 응원해 줘서 정말 고마워. 고집 세고 변덕스러운, 심지어 예민하기까지 한 남편 곁을 묵묵히 지켜 준 소연아, 고마워.

이번 환승은 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어.


그리고 이건 진담 같은 농담인데, 뭘 하든 36년까진 걸리지 않게 노력은 해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