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이해가 아니라 체험이다

『그리스인 조르바』 와 인간의 실존

bySOHEE

인간은 끊임없이 삶에 대해 정답을 찾으려 한다.

왜 태어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이 옳은지, 죽음 이후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바카라을 읽고 철학을 공부하며 종교를 찾고, 미래를 계획한다.

그러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 오히려 질문 하나가 남는다.

정말 삶에는 정답이 필요한 것일까?

소설 속 ‘나’는 삶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는 생각하고 분석하며 지식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조르바를 만나는 순간 그의 세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조르바는 특별한 철학바카라을 쓰지 않는다. 그는 위대한 이론을 설명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강렬하게 살아간다.

사랑할 때는 사랑하고, 노동할 때는 노동하고, 먹을 때는 먹으며, 슬플 때는 슬퍼한다. 그리고 기쁠 때는 춤춘다.

여기에서 지식인인 ‘나’와 조르바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이가 드러난다. ‘나’에게 삶은 이해해야 할 대상이지만, 조르바에게 삶은 참여해야 할 사건이다.

인간은 죽는다.
이것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다. 우리는 죽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한다. 내일이 있고, 다음 달이 있고, 언젠가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오늘의 삶을 미루고 미룬다.

그러나 죽음이 있다는 사실은 삶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유일하게 만든다.

조르바의 삶은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정말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가?”

그도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결함을 가진 인간이다. 욕망도 많고 실수도 하며 때로는 무모하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타인에게 맡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살아간다.

어쩌면 조르바의 위대함은 삶이 아름답기 때문에 삶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삶을 사랑한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철학은 결국 하나의 상징으로 압축된다.

춤.

조르바의 춤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몸짓이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춤으로 표현하고, 실패를 춤으로 견디며, 살아 있다는 사실을 춤으로 확인한다.
조르바의 춤은 이렇게 읽을 수 있다. “나는 실패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이것이 인간이 죽음에 맞서는 방식이기도 하다.

죽음을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죽음을 알고도 살아갈 수는 있다.
삶의 불확실성을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불확실한 삶을 선택할 수는 있다.
상실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상실 이후에도 다시 사랑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위대함은 완벽하게 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고도 다시 삶을 선택하는 데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지 완전히 알지 못한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다.
언제까지 살아갈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살아 있다.
조르바의 춤은 삶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말이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것으로 완성된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다.”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사실 하나를 잊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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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은 현실을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주로 역사와 교육, 에세이에 대한 글을 게재합니다. 읽고, 보고, 듣고, 사색하며 글을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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