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마저 사라진 단절된 시간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패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한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던지는 가장 낮고 건조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이 첫 문장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 앞에 내놓는 솔직한 자기고백이다. 이 소설은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린 한 남자가 자신의 진짜 이름과 옛 삶을 찾아 나가는 탐정 소설의 형식을 취한다. 하지만 여기서 탐정이 뒤쫓는 대상은 사건의 범인이나 다른 타인이 아니다. 시간의 안개 속에 파묻혀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자기 자신이다.
주인공 기 실바에게 시간은 매일 아침 차곡차곡 넘어가는 달력이 아니다. 그에게 세월은 어느 날 갑자기 중간이 텅 비어버린, 가위로 싹둑 잘라내 버린 필름 조각과 같다. 그는 10년 전의 기억이 통째로 끊어진 채 흥신소에서 일하며 타인의 뒤를 밟는 일로 하루를 보낸다. 자신의 과거는 찾지 못하는 탐정이 다른 사람의 비밀과 뒤조사를 하고 다닌다는 이 묘한 설정은, 소설 시작부터 삶이 가진 서글픈 부조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파리는 미로처럼 복잡한 골목길로 가득 차 있다. 모디아노는 사건이 일어난 정확한 날짜나 연도를 딱 부러지게 짚어주는 대신, 날씨와 공기의 느낌을 먼저 보여준다. ‘안개가 자욱했던 그해 겨울’, ‘비가 내리던 어느 오후’ 같은 축축하고 흐릿한 풍경이 반복된다. 이는 손에 잡히지 않는 주인공의 기억 상태를 눈앞에그대로 옮겨놓은 표현이다. 기 실바가 옛 흔적을 찾아 헤매며 만나는 인물들 역시 저마다 과거의 늪에 발이 묶여 있기는 마찬가지다. 퇴직을 앞둔 흥신소 소장 허트가 그에게 건네는 말은 이 도시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쉽게 잊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아주 잠깐 동안만 존재하고, 지나가 버리면 모래 위에 남은 발자국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그들이 기 실바에게 건네는 오래된 사진첩,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빛바랜 여권, 주소록에 적힌 낡은 이름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과거의 기록들이 얼마나 많이 부서지고 유실되었는지를 증명하는 서글픈 물건들이다. 기 실바는 이 흐릿한 단서 몇 개를 손에 쥐고, 이미 죽었거나 사라진 자들의 흔적을 쫓듯 파리의 어두운 밤거리를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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