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게 도착한 깨달음의 시간
어떤 인생은 큰 사건 하나로 무너지지 않는다. 폭발도 없고, 비명도 없고, 거대한 비극도 없다. 대신 하루하루 아주 조금씩 비스듬히 어긋난 채로 쌓이다가, 한참 뒤에야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그런 인생의 시간에 대한 소설이다. 바카라을 덮고 나면 잘못을 저질렀다는 죄바카라감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흘려보낸 시간의 무게가 더 크게 남는다.
주인공 스티븐스는 영국 시골의 대저택 달링턴 홀에서 평생을 보낸 집사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한 줄로 정리하려 한다.
"나는 위대한 주인을 위하여, 품위 있는 집사로 충실히 살았다."
그에게 시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위해 소모해야 할 재료였다. 젊은 시절의 체력, 예민했던 감수성,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청춘까지도, 모두 집의 품위를 위해 쓰여야 할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 문장은 단순한 독백이 아니라, 한 인간의 시간을 요약하는 선언처럼 들린다.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건, 그저 남아 있는 나날들뿐이다."
남아 있는 나날이라는 말은 미래를 가리키는 것 같지만, 사실은 지나가버린 향한 문장이다. 앞으로 남은 날이 얼마나 되는지보다, 지금까지의 날들을 어떻게 써왔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말이기 때문이다. 스티븐스는 새 주인의 차를 빌려 며칠간의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은 단순한 공간의 이동을 넘어, 과거의 기억을 차례대로 되짚어가는 과정이다. 달리는 차 안, 낡은 여관 침대, 해 질 녘의 바닷가에서 그는 평생 말하지 않고 묻어두었던 시간들을 하나씩 꺼내 본다.
이시구로의 문장은 조용하다. 격한 감정도, 드라마틱한 표현도 거의 없다. 오히려 지나치게 정중하고, 조심스럽고, 건조하다. 그런데 그 건조함 때문에 오히려 감정이 더 크게 울린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상처를 후회한다거나 괴롭다고 직접 말하지 못한다. 대신 이렇게 돌려서 말한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여긴다.’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라 믿었다."
그 말들 사이사이에 독자는 "나는 사실 알고 있었다, 그래도 외면했다"는 진짜 속마음을 읽게 된다.
<남아 있는 나날>에서 시간은 느리게 흐르다가, 인생의 후반부에 이르러서야 깨달음과 함께 한꺼번에 밀려온다. 젊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너무 늦게 보게 되는 시간, 그 늦게 도착한 세월이 바로 이 소설의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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