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포크너 - 소리와 분노

부서지고 뒤섞인 의식의 시간

by세인트
9788954620253.jpg문학동네


시계가 멈췄다고 해서 그 안의 시간이 함께 멈추는 것은 아니다. 바늘은 서 있어도 시간은 그 옆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 간다. 윌리엄 포크너는 이 소설에서 우리가 자꾸 현재를 놓치고, 과거를 밟고, 미래를 건너뛰다가 다시 현재로 추락하는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소설이 읽기 어려운 이유는 문장의 기교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이 원래 그런 식으로 어지럽게 뒤엉킨다는 사실을 포크너가 있는 그대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몰락해 가는 남부 가문을 배경으로 하지만, 이 작품이 다루는 진짜 알맹이는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시간의 그물 속에서 어떻게 허우적거리는가 하는 점이다.


소설의 첫 장을 지배하는 것은 잘 정돈된 사건이 아니다. 포크너는 집안이 왜, 어떻게 망했는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대신 누이의 몸에서 나는 나무 냄새, 비 오는 날의 눅눅한 공기, 진흙 묻은 속바지 같은 구체적인 감각을 먼저 보여준다. 독자는 인물의 코끝에 닿는 냄새와 귀에 박히는 소리를 통해 비극의 실체를 비로소 맞닥뜨린다.


이 소설의 시간은 달력처럼 차례대로 넘어가지 않고 마치 쏟아진 물감처럼 여기저기 번져 나간다. 이 혼란스러운 시간의 얼룩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는 화자가 바로 막내 벤지다. 벤지는 서른세 살의 몸을 가졌으나 세 살의 지능에 머물러 있어 언어의 질서를 세우지 못한다. 말로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는 그에게 세상은 이름 붙여진 사건이 아니라, 그저 피부로 느껴지는 자극들의 집합이다. 대신 그는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들로 세상을 기억한다. 그에게 과거와 현재는 경계 없이 섞여 있으며, 특정 냄새가 코끝을 스칠 때마다 그는 수십 년의 세월을 단숨에 넘어선다. 벤지가 누이 캐디를 기억하는 방식은 매우 단순하고, 바로 그 단순함 때문에 더 진짜에 가까운 진실을 건드린다. 그는 누이 캐디를 이렇게 말한다.


"캐디에게서 나무 냄새가 났다."


이 짧은 문장은 벤지의 세계를 드러내는 핵심이다. 냄새는 복잡한 생각이나 논리를 건너뛰어 시간을 되감는 가장 빠른 통로다. 한 번 맡은 냄새는 그때의 공기와 빛, 감정까지 한꺼번에 불러온다. 벤지에게 과거는 지나간 추억이 아니다. 담장 너머에서 아이들이 골프를 치며 "캐디!"하고 부르는 소리 하나에도, 벤지는 사라진 누이 캐디를 떠올리며 목놓아 울기 시작한다. 소리 하나, 냄새 하나 때문에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고, 과거가 현재 속에서 갑자기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벤지의 세계에서 시간은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다. 잊었다고 믿은 것들이 전혀 잊히지 않았다는 듯이 돌아와 그를 뒤흔든다.


우리는 대개 기억을 필요할 때 꺼내 쓰는 도구라고 믿는다. 그러나 벤지의 모습은 전혀 다른 사실을 보여준다. 기억은 내가 꺼내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이 들어와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시간을 강제로 들춰내는 것이다. 그래서 벤지가 울 때, 그 울음은 지금의 울음이면서 동시에 십 년 전의 울음이다. 한 사람의 목구멍에서 여러 시간대의 비명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셈이다. 벤지의 장이 유독 불친절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의 머릿속에 과거와 현재가 함께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오 분 전의 일과 십 년 전의 일을 똑같이 지금 일어나는 일로 겪으며, 누이 캐디가 없다는 사실을 매 순간 '현재 진행형'의 고통으로 느낀다. 포크너는 이를 통해 시간이란 똑같이 흘러가는 시곗바늘이 아니라 사람이 온몸으로 견뎌내는 무게라는 점을 밝혀낸다.


포크너는 소설의 제목을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가져왔다.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다'는 문장은 너무 흔히 쓰여 덤덤해졌지만, 포크너의 글 속에서 다시 날카롭게 살아난다. 어떤 삶은 끝내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다. 의미를 붙이려는 시도는 번번이 무너지고, 결국 남는 것은 소음과 분노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포크너는 거기서 멈추지 않으며 의미가 없어서 허무한 게 아니라,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는 사람이 끝내 포기하지 못해 비극이 생긴다는 것을 벤지를 통해 보여준다. 벤지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가문의 몰락을 누구보다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며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그 울음이야말로 이 소설이 내는 가장 정직하고 솔직한 소리다.


벤지의 시간이 감각의 파도라면, 큰아들 퀜틴의 시간은 목을 조여 오는 밧줄과 같다.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엘리트인 퀜틴은 시간이 의미없이 흘러가는 것을 참지 못한다. 흘러간다는 것은 지나쳐 버린다는 뜻이고, 지나간다는 것은 가문의 명예와 누이의 순결 같은 소중한 가치들이 돌이킬 수 없이 부서진다는 뜻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간은 부드러운 물길이 아니라 옴짝달싹 못 하게 죄어오는 끈이다. 포크너는 그 끈을 아버지의 냉소적인 목소리로 단단히 묶어버린다. 퀜틴의 머릿속에서 아버지는 끊임없이 허무를 속삭인다.


'이 시계는 희망과 욕망의 묘지다.' '시간을 기억하라고 준 게 아니다. 가끔은 잊어버리라고 준 거다.' '어떤 싸움도 이기지 못한다. 승리는 철학자와 바보의 환상이다.'


아버지가 넘겨준 할아버지의 시계는 시간을 가리키는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세월을 이길 수 없다는 절망의 상징이다. 이 말들이 퀜틴에게 가혹하게 들리는 이유는, 잊으라는 말이 곧 과거를 버리고 타협하며 살아가라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퀜틴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 아니, 살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그의 세계에서 잊는다는 것은 곧 배신이며, 잊지 못하고 매달리는 것만이 유일한 의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누이 캐디가 무너지고 집안이 망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시간을 멈춰 세워서라도 순결했던 순간을 지키고 싶어 한다. 퀜틴은 시계 유리를 깨뜨리고 바늘을 떼어내며 시계를 학대한다. 하지만 바늘이 사라진 시계태엽은 여전히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서랍 속에서도 째깍거리는 소리로 그를 비웃는다. 거리로 나선 퀜틴이 시계방 창문 너머 수많은 시계들이 제각기 다른 시간을 가리키며 돌아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 장면은 기괴하다. 시계의 바늘을 부숴도 세상의 시간은 멈추지 않으며, 오히려 시간이라는 유령이 사방에서 그를 압박해온다.


그는 숨을 쉬면서도 이미 과거라는 차가운 물속에 들어앉아 있다. 머릿속에서 되감기 버튼이 고장 난 테이프처럼, 누이와의 대화와 과거의 수치스러운 장면들이 반복해서 튀어나와 그를 괴롭힌다. 퀜틴의 장에서 문장들이 잘게 쪼개지고 접속사마저 사라지며 문법이 무너지는 것은, 그의 정신이 이미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분열하는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는 결국 주머니에 무거운 철 조각을 넣고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시간이 영원히 멈춘 세계를 택한다. 그것은 시간을 이겨보려 했던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이고도 무력한 저항이다.


셋째 제이슨의 장으로 넘어가면 문장의 온도는 급격히 식어버린다. 벤지가 냄새에 흔들리고 퀜틴이 강박에 시달렸다면, 제이슨에게 시간은 오직 영수증이자 계산서다. 그에게 '언제'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얼마나' 손해를 보았는지 표현하는 숫자만 중요할 뿐이다. 제이슨의 하루는 면화 주식 시세를 확인하고, 전보로 날아오는 가격 숫자에 일희일비하며, 시간을 단위별로 쪼개어 계산하는 일로 채워진다. 그는 시간을 감정이 아니라 돈 계산하듯 다룬다. 하루는 하루치 일당이 되고, 분노조차 화를 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의 크기로 환산된다. 그는 다른 사람의 흔적을 볼 때마다 사랑이나 불쌍함 대신 억울함과 모욕을 먼저 느낀다.


제이슨은 집안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마음이 가장 가난한 인물이다. 그는 누이 캐디가 보내오는 양육비를 가로채 조카의 미래를 짓밟고, 어머니의 불안을 이용해 돈을 슬쩍 챙기며, 자신의 시간을 복수와 훔쳐보기로 채운다. 그가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 자신에게 손해를 입혔느냐 아니냐다. 그의 생각은 오직 외골수이고 타인가의 관계는 끊겨 있다.


'한 번 그랬으면, 끝까지 그런 것이다.'


이 문장은 제이슨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는 사람을 단 하나의 사건이나 성격으로 딱 찍어 고정해 버린다. 고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서 시간에 따른 변화의 가능성을 아예 앗아가는 일이다. 사람은 변할 수도 있고 지나간 뒤에 다르게 기억될 수도 있지만, 제이슨은 그런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그가 허락하는 시간은 오직 벌을 주고 보복하는 시간뿐이다. 제이슨은 스스로 매우 똑똑하게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지나간 원한을 에너지를 삼아 과거라는 감옥에 자신을 가두고 있을 뿐이다. 제이슨의 문장이 짧고 딱딱하며 매몰찬 것은, 그의 삶에 여백이 들어설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간은 흐르는 물이 아니라 차가운 쇠붙이가 긁히는 소리와 같다.


포크너는 소설의 마지막 4장에 이르러 화자를 제3자의 시선으로 옮기고, 흑인 하인 딜지를 통해 시간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벤지의 시간이 파도였고 퀜틴이 꼬인 매듭이었으며 제이슨이 숫자였다면, 딜지의 시간은 그저 묵묵히 버텨내는 하루다. 비가 내리는 부활절 아침, 딜지는 낡은 옷을 껴입고 절뚝이는 몸으로 부엌으로 내려온다. 콤프슨 가문의 주인이 될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고통에 빠져 집안을 팽개쳤지만, 딜지는 부엌 불을 지피고, 음식을 만들고, 백치 벤지의 옷을 입혀 챙긴다. 부서진 일상을 다시 손으로 묵묵히 일궈내는 사람이다.


딜지의 방에 걸린 낡은 시계는 한 시간이 늦게 가고, 종이 울리는 횟수도 맞지 않다. 하지만 딜지는 그 엉터리 종소리를 듣고도 "여덟 시군" 하고 정확하게 지금 시간을 가늠한다. 그것은 숫자로 찍히는 기계 시계가 아니라, 삶의 순리와 성실한 노동으로 익힌 진짜 지혜다. 기계인 시계의 숫자에 집착하다 자살한 퀜틴이나, 전보 숫자에 매달려 화를 내는 제이슨과 달리, 딜지는 시계에 매이지 않고 자기만의 시간을 사는 것이다.


딜지는 부활절 예배당에서 목사의 설교를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지막이 말한다. 자신이 이 집안의 시작과 끝을 모두 보았다고. 딜지의 시간은 개인의 욕심이나 고통에 매달리지 않고, 세상이 흘러가는 커다란 순리 속에 자신을 맡겨두는 시간이다. 콤프슨 가문의 사람들이 각자의 지옥에서 몸부림칠 때, 딜지는 묵묵히 다음 끼니를 준비한다. 그렇다고 포크너는 딜지를 통해 거창한 구원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난장판 속에서도 다음 날을 맞아 살아가는 진짜 힘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그것은 어떻게든 견뎌내는 힘이며, 이 견딤이야말로 모든 것이 부서진 자리에서도 사람이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마지막 뼈대라는 것이다.


결국 <소리와 분노>는 우리가 자주 잊는 사실을 일깨운다. 시간은 늘 멀리서 흘러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먼저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포크너는 인물들의 입을 빌려 쉽사리 고통을 설명하지 않고, 온몸으로 느껴지는 압력으로 보여준다.


'그 짧은 순간, 마치 지나온 시간과 절망이 통째로 하나의 목소리로 바뀐 것 같았다.'


이 대목은 사람의 감정이 터져 나오는 순간의 무게를 그대로 전해준다. 포크너는 슬픔과 아무것도 아닌 것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차라리 슬픔을 택하겠다고 은연중에 내비친다. 슬픔은 보기 좋지도 않고 사람을 망가뜨리기도 하지만, 적어도 내가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안타까운 증거이기 때문이다.


바카라을 덮고 나면 시간에 대한 생각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시간은 우리를 무너뜨리기도 하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시간은 단순히 지나쳐 가는 길목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부딪히고 어긋나며 쌓이는 흔적이다. 포크너는 네 명의 인물을 통해 시간이라는 무게가 사람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또 어떻게 버티게 만드는지를 있는 그대로 기록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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