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 - 픽션들

미로와 거울 속에 중첩된 무한의 시간

by세인트
XL.jpg민음사


보르헤스는 '시간'이라는 익숙한 단어를 낯설게 만든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은 대개 한 줄로 곧게 뻗은 직선이다. 오전이 지나면 오후가 오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고 믿는다. 그래서 후회도 그 선 위에 놓인다. "그때로 돌아가면 다르게 했을 텐데"라는 말은 언제나 이미 지나간 직선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보르헤스는 그 선을 태연하게 접어버린다. 종이를 접으면 평면이 입체 모양으로 바뀌듯, 그는 한 줄기 시간을 접어 길이 아닌 하나의 '건축물'처럼 만든다. 시간은 흐르는 물길이 아니라, 여러 방과 복도가 연결된 구조가 된다. 그렇다면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어딘가에 완성된 모습으로 서 있게 된다.


보르헤스의 소설은 대체로 차갑다. 하지만 그 차가움은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정을 뚫고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려는 집중 때문이다. 프루스트가 차에 적신 과자 향기로 기억을 살려냈다면, 보르헤스는 종이 위의 도형과 상상 속 지형으로 시간을 깨운다. 그래서 보르헤스를 읽고 나면 감동보다 먼저 방향 감각이 흔들린다. 익숙한 길에서 갑자기 표지판이 바뀐 것처럼, 내가 서 있는 곳이 현재인지 과거인지, 아니면 '있을 법한 과거'들 중 하나인지 헛갈리기 시작한다. 그 혼란이야말로 보르헤스가 설계한 시간의 모습이다.


픽션들 1부에 실린 <두 갈래 길의 정원>을 예로 들면,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 나무들은 다 비슷해 보이고 발자국은 금세 지워진다. 그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한쪽 방향을 찾는다. 어느 쪽으로든 계속 가다 보면 길을 찾으리라 믿는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숲은 다르다. 이 숲에서는 방향을 찾는 행위 자체가 시간에 대한 오해가 된다. 내가 한 선택이 하나의 결과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무너진다. 선택은 결과를 하나로 줄이지 않는다. 선택은 여러 갈래의 결과를 만들뿐 아니라 그 갈래들은 동시에 존재한다. 시간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가는 직선이 아니라, 나뭇가지처럼 모든 가능성이 제각기 뻗어나가는 형상이다. 보르헤스는 이 소설에서 시간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한다.


'시간은 수많은 미래의 무한한 갈래로 갈라지며, 그 갈래들은 서로 얽히고 설키며 늘어난다.'


여기서 보르헤스는 당신이 하지 않은 선택은 사라진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사랑을 잃었다"고 말하고 "기회를 놓쳤다"고 말하며, "한 번의 말실수로 관계가 끝났다"고 말한다. 그 말들은 모두 일직선 위에서만 성립한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묻는다. 만약 시간에 여러 갈래가 있다면 어떨까. 어떤 갈래에서는 내가 그 말을 내뱉지 않았고, 어떤 갈래에서는 내가 떠나지 않았다면 어떨까.


'대부분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존재하지 않지만, 어떤 시간 속에서 당신은 존재하고 나는 존재하지 않으며, 또 다른 시간 속에서는 우리 둘 다 존재한다.'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하고 떠올릴 때마다 그 상상은 단지 허공으로 사라지는 공상이 아니라, 다른 갈래에서는 진짜 현실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가벼운 의문이 아니다. "다른 선택도 가능했다"는 말이 위로가 되기는커녕, 우리가 포기한 길들이 어딘가에서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여기서 우리에게 도덕적 교훈을 주려는 것이 아니므로 "그러니 선택을 조심하라"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그대신 시간의 구조를 보여주고 독자 스스로 그 안에서 길을 찾게 만든다. 때문에 오늘 어떤 길로 돌아갈지, 어떤 말을 삼키고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같은 사소한 고민이 갑자기 무거워진다. 가능성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가볍게 움직이지 못한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말은 아름답지만, 잘못하면 헤어나올 수 없는 미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보르헤스의 미로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미로를 단순히 감옥으로 보지 않고, 그 안에서만 만날 수 있는 뜻밖의 깨달음을 선물한다. 길 하나만 바라볼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갈래가 많아질 때 비로소 선명해진다. 인간이 시간에 대해 얼마나 단순하게 믿고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질문은 계속된다. 시간이 갈래를 만들 수 있다면 멈출 수도 있을까. 보르헤스의 <비밀의 기적>은 멈춘 시간이라는 상상을 다루는 작품이다. 사형을 앞둔 작가 흘라디크가 마지막으로 자신의 희곡을 끝내기 위해 단 하루의 시간을 기도하는 이야기다. 여기서 원고를 완성하는 일은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어이없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의 마지막 정리다. 하지만 사람은 늘 시간이 모자라다. 삶은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을 다 맺기 전에 끝난다. 기적은 총알이 발사되기 직전 일어난다.


'물리적 세계는 정지했다. 병사들의 동작은 멈추었고, 허공의 총알조차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시간이 멈춘다. 바깥세상은 그대로 정지하고 내면의 세계만 길게 펼쳐진다. 이때 보르헤스가 겨누는 것은 시계의 바늘이 아니라 의식 속의 시간이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시계의 1분이 언제나 같은 길이가 아니라는 것을. 어떤 1분은 지나치게 짧고, 어떤 1분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길다. 기다림의 1분, 작별의 1분은 한없이 길다. 반대로 행복한 1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보르헤스는 그 차이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묻는다. 사람이 원하는 것은 그저 오래 사는 것인가, 아니면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일을 마칠 수 있는 시간인가.


어떤 사람에게 삶은 오래 견디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이라도 제대로 목적지에 다다르는 것이다. 어떤 문장을 끝까지 쓰는 것, 어떤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 주인공은 멈춘 시간 속에서 머릿속으로 희곡의 마지막 점을 찍는다. 시간은 단순한 길이가 아니라 밀도이며, 일을 끝맺을 수 있는 기회다.


이 바카라은 여러 글에 담긴 시간의 문장을 모으는 것에서 시작하지만, 결국 그 문장들이 가리키는 것은 시간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는가 하는 점이다. <비밀의 기적>은 그 질문을 던지는 글이다. 시간이 멈춘다면 사람은 구원받는 것일까, 아니면 더 괴로와질까. 멈춘 시간은 희망일 수도 있지만 고통을 더 길게 늘리는 오랏줄이 될 수도 있다. 보르헤스는 그 경계를 흔든다. 여기서 그의 냉정함이 다시 드러난다. 그는 비극을 길게 늘려 쓰지 않는다. 슬픔과 절망의 문장을 길게 나열하지도 않는다. 어떤 운명은 한두 문장으로 슬쩍 지나쳐버린다. 독자는 그 짧은 문장에 더 크게 흔들린다. 감정은 풍부한 설명보다 차라리 끊어진 문장 사이의 빈칸에서 더 크게 일어난다. 보르헤스의 문장들은 길게 설명하는 대신 그 빈 공간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그 빈 공간은 시간과 닮았다. 시간이란 결국 일어난 일을 빼곡하게 채워놓는 일기장이 아니며 사라진 것들의 자리, 말하지 못한 것들의 공백이다. 보르헤스는 그처럼 시간을 공백으로 드러낸다. 다음으로 넘어가면 그는 멈춘 시간보다 더 무서운 시간을 보여준다. 너무 많이 기억하는 시간, 즉 잊어버리는 힘을 잃어버린 시간이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읽으면 기억력이 좋다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른 것을 알게 된다. 푸네스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한 번 본 풍경의 아주 작은 구석, 지나간 순간의 느낌, 그때의 빛과 공기의 온도까지 전부 안고 살아간다. 그는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말한다.


'나의 기억은 쓰레기 하차장과 같다.'


우리는 보통 기억을 필요한 물건을 꺼내 쓰는 상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푸네스의 기억은 상자가 아니라 멈추지 않고 밀려드는 홍수이다. 기억이 너무 많으면 현재가 무너진다.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많은 부분을 잊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사는 동안 많은 것을 잊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 정리다. 쓸데 없는 것을 버려야 중요한 것이 남기에 필요없는 가지를 쳐내는 작업이 곧 삶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푸네스는 쳐내지 못한다. 모든 순간이 똑같이 선명하게 남아있어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 수 없다. 의미는 필요 없는 것을 지워낼 때 비로소 드러나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푸네스의 입을 빌려 기억의 한계를 말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차이점을 잊는 것이며,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는 것이다.'


지움이 없는 삶은 빛과 그림자의 차이가 사라진 풍경과 같다. 빛이 너무 강하면 눈이 멀듯, 기억이 너무 차오르면 현재의 시간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작품은 앞서 다룬 작품들에 비해 역설적이다. 프루스트의 시간은 감각으로 되살아나는 시간이다. 잊은 줄 알았던 시간이 과자 향기 하나로 부활한다. 그 장면은 아름답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모든 것이 죽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면 어떻게 될까를 묻는다. 그때 삶은 아름답기보다 질식할 것같은 두려움이다. 어떤 감정은 잊혀야만 다음 감정이 들어올 수 있다. 어떤 상처는 무뎌져야만 다시 살아갈 수 있다. 잊어버리는 능력은 시간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일지도 모른다. 푸네스는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과거에 붙들려 현재를 놓쳐버린다. 잊을 수 있는 힘이야말로 사람이 다시 살아가게 만드는 구원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한다.


여기서 보르헤스는 다시 도서관의 이미지로 돌아간다. 도서관은 기록이 모인 공간이자 시간의 저장고다. 그러나 저장고가 너무 커지면 그 안에서 길을 잃는다. <바벨의 도서관>은 그 공포를 확대한다. 모든 바카라이 존재한다면 진실도 존재하지만 거짓도 끝없이 존재한다. 정답이 너무 많다면 정답은 더 이상 정답이 아니게 된다. 시간도 마찬가지다. 살 수 있는 시간이 무한히 많다면 우리는 어떤 시간을 진짜 내 삶이라 부를 수 있을까. 보르헤스의 시간은 이렇게 정리된다. 시간은 모자라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는 너무 많아서 괴롭다. 사람은 한 번의 삶이라는 작은 그릇을 가지고 무한한 시간을 담으려 애쓴다. 그래서 보르헤스의 문장은 단호하고 또렷하다.


이 바카라은 시간의 문장을 모아 각 작품이 갖는 의미를 풀어낸다. 그런 점에서 보르헤스는 한 챕터의 작가에 그치지 않고, 이 바카라 전체의 관점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중심축이다. 보르헤스는 시간을 감정이나 사건으로만 다루지 않고 시간의 틀 자체를 새로 그려내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저 흘러간다는 믿음 대신, 여러 갈래로 나뉜다고 말한다. 시간은 늘어나고, 너무 많이 쌓여 무너진다. 울프의 <등대로>가 흔들리는 마음속 시간을 보여주었다면, 보르헤스는 그 마음 아래에 깔린 시간의 틀을 보여준다. 흐름이 아니라 구조다. 하지만 그 구조가 끝내 가리키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사람이 시간 앞에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 작은 존재가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만들려고 애쓰는지를 보여준다.


나는 이 장을 보르헤스식 결말로 명확하게 닫고 싶다. '시간은 길이 아니라 미로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묻게 된다. 그렇다면 미로에서 나오는 법은 무엇인가. 보르헤스는 직접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슬쩍 힌트를 남긴다. 미로에서 나오는 법은 정답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가보고 옆으로도 가며 끝까지 걸어보는 것이라고. 그 과정에서 어떤 길은 내 길이 되고 어떤 길은 버려진다. 그러나 버린 길이 완전히 사라졌는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계속 이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끝내 단정하지 않는다. 보르헤스는 도서관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덧붙인다.


'도서관은 무한하고 반복된다. 만약 어떤 여행자가 어느 방향으로든 도서관을 가로지른다면, 그는 몇 세기 후에 똑같은 바카라들이 똑같은 순서로 반복되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섣불리 단정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보르헤스가 시간을 다루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다. 우리는 시간에 대해 너무 쉽게 단정하곤 한다. "지나갔다", "끝났다", "잊어버렸다"라고. 보르헤스는 그 단정들을 흔들어 놓는다. 그리고 흔들린 자리에서 독자는 자신의 시간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내가 놓친 말들, 내가 지나친 계절, 잊었다고 믿었던 얼굴들이다. 그것들이 정말 사라졌는지, 아니면 다른 갈래에서 아직 살아 있는지 묻게 만든다. 그 질문이 남는 한 보르헤스는 할 일을 다한 것이다.


그의 글은 답을 내어주지 않지만 질문을 바꾼다. "시간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방식으로 시간을 믿고 있었는가"로. 그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시간의 문장을 읽을 준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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