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지쳐 찾아든 늦여름의 나들이
계곡에 물놀이만 있는 건 아니다. 여름 한 철을 빼면, 계곡의 낯빛은 대개 적막하다. 그 적막은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고 무엇도 준비하지 않는 청청함이다. 그러다 누군가 발을 들이는 순간, 빛과 소리가 스며들며 무언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순수하고 여린 것들은 누가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그 결이 흐트러지곤 한다. 내 시선이 닿는 순간, 적막하던 자연이 이미 내 방식대로 물들기 시작하듯이.
화암사 가는 길에서도 그랬다. 다만 이번엔 자연을 내게 맞추기보다, 내가 자연 속으로 스며들었다. 수풀 위로 해가 지나가고, 잠시 비친 볕을 놓칠세라 가는장구채가 꽃을 디민다. 다람쥐가 기슭을 미끄러져 내려와 물이끼 곁에 몸을 숨긴다. 나는 숲 내음을 맡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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