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한 단일 품종이고 싶던 내가, 섞이며 편안해지기까지
얼마 전, 집안일로 내려온 동생이 화이트와인 두 병을 두고 갔다. 둘 다 뉴질랜드 와인인데, 하나는 '쇼비뇽 블랑'이라는 한 품종으로만 빚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여러 품종을 섞어 만든 유기농 블렌딩 와인이었다. 와인도 섞는다는 걸 그제야 처음 알았다. '샤르도네'니 '피노 그리'니 품종 이름 몇 개는 주워들었어도, 와인에 '병배'라는 세계가 따로 있는 줄은 몰랐다. 잔을 채우다 말고 나는 엉뚱하게 보이차를 떠올렸다.
쇼비뇽 블랑이 프랑스 보르도에서 자라다 뉴질랜드로 건너와 전혀 다른 개성을 얻었듯, 차나무도 기후와 흙을 따라 수없이 갈라졌다. 같은 품종이라도 다른 땅에 서면 다른 향을 낸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순정한 한 가지 맛에 만족하지 않고, 굳이 이 잎과 저 잎을 비율을 달리해 섞어왔다. 한 품종의 또렷함을 즐기는 날이 있고, 여러 잎이 어우러져 만든 둥근 맛을 찾는 날이 있다. 클래식이냐 블렌딩이냐, 찻상 앞의 우리는 그날의 마음에 따라 손을 옮긴다.
가르치는 일에도 닮은 두 길이 있었다. 한 우물만 깊게 파는 방식과, 형편에 맞춰 이것저것 섞는 방식. 일본의 국어 교사 하시모토 다케시는 『은수저』라는 소설 한 권으로 삼 년을 가르쳤다고 한다. '한 학기 한 권 읽기'의 먼 원조인 셈이다. 작품에 나온 음식을 함께 먹으러 가고 배경이 된 거리를 함께 걸으며, 단 한 권을 오래 우려낸 것이다. 반대로 토론 수업의 경우, 자유토론과 신호등토론, 고전식 토론 같은 부품들을 그날의 주제와 아이들에 맞춰 갈아 끼우고 섞어내기도 한다. 오래 해 보니 어느 쪽이 옳다고는 못 하겠다. 단일 품종에도, 블렌딩에도 저마다의 명품이 있는 법이니.
정작 마음이 오래 머문 건 와인도 수업도 아니라, 섞인다는 일 그 자체였다. 젊은 시절의 나는 순정한 단일 품종이고 싶었다. 제 빛깔 하나를 곧추세우는 것이 곧 나다움인 줄 알았다. 누구의 색에도 물들지 않겠다며 사상의 울타리를 세웠고, 다른 향이 끼어들면 내 맛이 흐려진다 여겨 자주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러나 섞일 줄 모르고 제 맛만 고집하던 시절의 나는, 돌이켜보면 어딘가 외롭고 모가 나 있었다. 좋은 블렌딩은 개성을 지우는 일이 아니었다. 다른 향과 부딪쳐 모난 데를 둥글리고, 모자란 자리를 슬며시 메우는 일. 제 색을 조금 내어준 자리에 남의 색이 스며, 그렇게 어우러지고서야 비로소 길고 깊은 뒷맛이 났다.
밤이 깊었다. 동생이 두고 간 두 병 가운데, 나는 굳이 섞어 빚은 쪽을 골라 마개를 열었다. 잔 안으로 옅은 풀빛이 천천히 차오른다. 한 모금 머금자 여러 향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혀 위를 지났다. 어느 것 하나 도드라지지 않고,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은 채로. 나는 그 섞인 맛을 오래 굴리며, 아직 다 어우러지지 못한 내 안의 향들을 가만히 헤아린다.
이 글은 사물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며 '낡아가는 나'를 적는 산문 연재 《닦아도 중고지만, 매일이 새것 같아서》의 한 편입니다. 화요일과 금요일에 한 편씩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