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일곱 번째 편지(2021.4.12)·언니공동체(2021.4.21)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구원 11년 차의 봄은 전염병과 함께 왔습니다. 곰처녀가 사람이 되는데도 100일, 아니 스무 하루면 충분했다지만 저는 모른 척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을 만큼의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선 절대로 서둘러선 안 된다는 것을요. 35년 세월의 관성을 거스르는 일이 그리 쉬울 리 없을 테니까요. 최대한 침착하게, 숨을 고르고 또 고른 후 마음으로 정한 시간이 10년이었습니다. 10년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가장 긴 시간이었거든요. 그렇게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10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계산해도 분명히 10년이 흘렀는데 아무리 봐도 도무지 크게 달라진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분명히 달라진 것이 있기는 했습니다. 10년간 성큼 자라난 아이들과 집의 온 벽면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집 여기저기에 언덕처럼 쌓여있는 바카라들만은 10년 세월의 여실한 증거가 되어주고 있었습니다.
이 엄청난 양의 바카라들을 통과해 낸 나는 과연 어디가 어떻게 달라진 걸까?
차마 대놓고 물을 수 없는 질문이 틈만 나면 들이닥쳤지만 도무지 대답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말할 수 없이 초조해졌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직면하는 것만 빼고는 어떤 모험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무리라도 기꺼이 감수할 작정이었습니다.
어떤 장애물이라도 가뿐히 뛰어넘어 집을 뛰쳐나갈 준비가 되어있던 제 손발을 묶은 것은 어이없게도 코로나였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 자체가 치명적인 리스크라니, 너무나 당연한 루틴이라 믿었던 아이들의 등교마저 무작정 연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슨 일을 새로 도모할 수 있을까요? 실망과 안도가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조급함에 스스로를 다그치고 있었지만, 솔직히 막막한 게 사실이었거든요.
이대로 당장 집 밖을 나가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집안에 있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뭐라도 해야 할 텐데, 대체 뭘 하면 좋단 말인가?
아니,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잠을 설치며 바스락거리고 있던 삼월의 어느 새벽이었습니다. 뭐라도 해보겠다고 다시 시작했던 블로그에 이웃 새 글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습니다. 습관적으로 훑어보던 중 ‘모집, 엄마의 비움 프로젝트’라는 포스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큰 기대가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하루에 고작 물건 3개씩 비워내 무슨 대단한 일이 벌어질까 싶었거든요.
어차피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니 이참에 일단 바카라이라도 정리해 놓자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절이 네 번 바뀌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시작된 이 작고 작은 움직임은 저와 공간에 어떤 변화를 일으켰을까요? 앞으로 4주간은 1년 동안 물건을 비워내며 체험했던 변화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어디에선가 꼭 1년 전의 저처럼 새벽잠을 설치고 있을 당신에게 작은 실마리라도 되기를 소망하며 정성을 다해보겠습니다.
한 달간은 명료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집안 구석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명백한' 쓰레기 3개를 찾아내는 게임. 유통기한이 지났거나, 고장이 났거나, 작아졌거나. 저절로 궁금해졌습니다. 왜 저는 이것들을 집안에 그리 오래 모셔 두었던 걸까요?
그래도 '언젠가'는 필요할 때가 있지 않을까? 어떻게든 다시 써먹을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맞습니다. 그것은 미련이었습니다. 외출할 때는 결코 입지 않을 옷은 집에서 막 입을 옷으로, 먹다 남은 술은 요리용으로, 빈 선물박스는 정리용으로 쓰임새를 격하시키면 어떻게든 다시 써먹어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리 활용되는 물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외출용 옷은 집에서 입기에 편치 않았고, 새 술 먹을 때도 배달음식이었는데 남은 술 쓰자고 요리를 할 가능성은 희박했으며, 빈 박스에 정리할 물건들을 가려내는 작업을 할 시간은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용도를 다한 B급, C급 물건들이 집안에 하나둘씩 쌓여가는 동안 공간 역시 본연의 쓰임새를 잃어갔습니다.
앉을 수 없는 소파, 음식보다 잡동사니가 더 많이 올라간 식탁, 더 이상 수납이 불가능한 서랍들로 꽉 찬 이 공간에서 '언젠가의 필요'는 늘 잘 정돈되어 있는 집 밖의 새 상품으로 해결되었고, 당장의 필요가 해결되고 남은 것들은 이제는 그저 습관적으로 남는 공간 어딘가로 비집고 들어가곤 했습니다.
한 달은 눈에 보이는 '잡동사니'들을 집 밖으로 내보내는 것만으로도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물건이 빠져나갔는데도 걱정했던 '불편'은 정말 1도 없었습니다. 불편은커녕 신기한 홀가분함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오래 참아 왔던 '근심'을 비로소 풀어내는 그 순간의 느낌과 너무나 비슷했습니다.
세상에나 세상살이 정말 별 거 없구나!!
몸 안의 노폐물만 제때 밖으로 내보낼 수 있어도
누릴 수 있는 이토록 가까운 '천국'을 두고
참 어렵게 돌고 돌며 헤매어 다녔구나!
하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바로 그 순간 말입니다. 그 엄청난 해방감에 비하자면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가는 공간의 변화는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엄마의 비움 프로젝트, 공간비움 + ~10Days! (2020.3.23)
늘 머무는 공간, 마음을 그 공간으로 잡아오는데 참 오래 걸렸다.
마음이 준비되자 기다렸다는 듯 날 찾아온 기회!
엄마의 비움 프로젝트~^^
D+1
1. 모아놓은 스프들
2. 나무젓가락
3. 디톡스한다고 왕창샀다가 유통기한 지나버린 무첨가두유
D+2
1.냉동실에 쌓여있던 아이스팩
2.언제 샀는지 기억도 안나는 냉동음식
3.언젠간 쓰려고 모아뒀던 유리병
4. 먼지까지 탈탈 털어비운 가방
D+3
1. 이미 보상기간 지난 제품 보증서
2. 너덜너덜해진 벽지와 뽁뽁이
3. 혹시 몰라 2년 보관한 모니터 컴퓨터
4. 에코백도 먼지 탈탈 털어 인증
D+4
1.유통기한 지난 생수들 : 생수유통기한 12개월, 오늘 첨 알았다는~^^;;
2.혹시나 싶어 차곡차곡 모아둔 쇼핑백 : 나무젓가락 수준이라 필요한 소량 챙겨놓고 비움 결정
3.자꾸만 튀어나오는 쓰임없는 물건들
D+5
1. 옷장에서 고른 지난 1년간 한번도 안 입은 옷가지 몇개
2. 코팅벗겨진 후라이팬
3. 화장대 아래 잡동사니 비움
D+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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