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5분혁신.가정경영]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남자, 특히 중년 남자가 절대 적으로 돌리면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아내다.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아내는 나의 블랙박스다. 내가 언제 급정거했는지 안다. 어디서 미끄러졌는지 안다. 어떤 순간에 신호 위반을 했는지, 어디서 과속을 했는지 모두 안다. 나는 나를 편집본으로 기억한다. 아내는 원본 파일을 갖고 있다.
밖에서의 나는 꽤 그럴듯하다. 회의실에서는 전략을 말한다. 고급식당에서는 점잖게 메뉴를 고른다. 강연장에서는 인생과 경영을 논한다. 가끔 사람들은 나를 품격 있는 사람으로 오해한다. 고마운 일이다. 세상은 아직 내 집 안 풍경을 모른다.
집에 돌아오면 진실이 열린다. 자동차 키를 못 찾아 온 집을 순례한다. 냉장고 문을 열고 “뭐 먹을 거 없나”를 연신 반복한다. 살 빼겠다고 선언한 날 밤, 어느새 과자 봉지를 뜯는다. “나 안 피곤해”라고 말한 지 3분 만에 소파에서 코를 곤다. 본인은 모른다. 아내는 안다.
아내는 더 깊은 영역도 안다. 내가 언제 허세를 부리는지 안다. 언제 삐졌는지 안다. 언제 모른 척하는지 안다. 말투가 반 박자만 어긋나도 감지한다. 침묵이 3초만 길어져도 알아챈다. 중년 남자의 허술한 방어 체계로는 막을 수 없는 고성능 탐지기다.
심지어 가장 숨기고 싶은 치부까지 속속들이 안다. 어떤 자세로 잘 때 코를 더 크게 고는지 안다. 어떤 음식을 먹은 날 방귀 냄새가 심해지는지도 안다. 본인은 품격을 지키고 싶다. 아내는 이미 데이터를 축적했다. 결혼은 사랑의 제도이자 장기 관찰 연구다.
블랙박스는 평소에는 조용하다. 사고가 나면 진실을 말한다. 아내도 그렇다. 평소에는 넘어간다. 참고, 웃고, 모르는 척한다. 그러다 남자가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는 순간, 조용히 한 문장이 나온다.
“그때도 그랬잖아.”
무서운 말이다. 이 문장에는 시간 여행 기술이 들어 있다. 남자는 이미 폐기한 사건이다. 아내는 보관 중이었다. 날짜는 흐릿해도 감정의 해상도는 4K를 넘어 8K다. 당시의 표정, 말투, 분위기가 되살아난다. 기억의 법정이 열린다. 증거는 충분하다. 항소는 불가능하다. 판례가 많다.
진짜 놀라운 지점은 따로 있다. 아내가 안다는 사실이 아니다. 알고도 대개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내는 남편의 허세를 안다. 약점을 안다. 허술함을 안다. 큰소리칠 때의 불안을 안다. 태연한 척할 때의 초조함을 안다. 그래도 매일 폭로하지 않는다. 밥 먹었냐고 묻는다. 약 챙겨 먹으라고 말한다. 병원 예약하라고 잔소리한다. 입고 나갈 옷이 이상하면 한숨을 쉬면서도 바로잡아준다. 이건 감시가 아니다. 오래 견딘 사랑이다.
사랑은 종종 상대를 멋지다고 오해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오래가는 사랑은 오해가 벗겨진 뒤에 남는다. 좋은 모습만 보였을 때의 호감은 쉽다. 진짜 어려운 일은 그 사람의 찌질함을 본 뒤에도 곁에 남는 일이다. 가족은, 아내는 그 어려운 일을 매일 한다.
가족은 나의 내부자다. 내 인생의 비공개 회의록을 갖고 있다. 내가 어떤 말에 약한지, 어떤 상황에서 도망치는지, 어떤 핑계를 반복하는지 안다. 그중에서도 아내는 가장 오래된 기록자다. 내 삶의 편집본이 아니라 원본을 본 사람이다.
그래서 가족에게 잘해야 한다. 특히 아내에게 잘해야 한다. 약점을 들킬까 봐서가 아니다. 이미 다 들켰다. 다 알고도 곁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더 깊은 예의를 갖춰야 한다.
중년 남자의 평화는 거창한 데 있지 않다. 집에 들어갈 때 표정을 조금 부드럽게 하는 데 있다. “고마워”라는 말을 미루지 않는 데 있다. 밥 먹었냐는 질문을 귀찮게 듣지 않는 데 있다. 잔소리 속에 들어 있는 걱정을 알아차리는 데 있다. 말대꾸를 한 박자 늦추는 데 있다. 그 한 박자가 가정의 평화를 살린다.
아내라는 블랙박스는 나를 고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내가 어디서 자꾸 사고를 내는지 알려주기 위해 존재한다. 어떤 말로 사람을 서운하게 하는지, 어떤 습관으로 스스로를 망치는지 보여준다. 듣기 싫을 때가 많다. 대개 맞다. 그래서 더 듣기 싫다.
사랑은 때로 경고음처럼 들린다. 삐, 삐, 삐. “그만 먹어요.” “병원 좀 가요.” “말 좀 예쁘게 해요.” “운전 조심해요.” 남자는 그 소리를 잔소리라고 부른다. 세월이 지나면 알게 된다. 나를 향한 가장 오래된 안전장치였다.
그러니 아내에게 잘하자. 무서워서가 아니다. 고마워서다. 나를 가장 많이 알고도 아직 내 편으로 남아 있는 사람. 내 멋진 장면보다 민망한 장면을 더 많이 보고도 오늘 저녁 뭐 먹을 거냐고 묻는 사람. 그런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블랙박스는 사고 뒤에 진실을 말한다. 아내는 사고 전에 신호를 준다. 그 신호를 무시하면 인생 운전은 자꾸 헛돈다. 짜증 섞인 경고음 덕분에 우리는 아직 크게 부서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괜히 한 번 말해보자. “고마워.” 쑥스럽다면 안 하던 설거지라도 하자. 안 하던 화장실 청소라도 하자. 말보다 설거지, 청소가 더 진심 같을 때도 있다. 단, 그릇은 제대로 헹궈야 한다. 변기는 빡빡 문질러야 한다. 아내라는 블랙박스는 설거지와 청소의 진실도 기록한다. ⓒ혁신가이드안병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