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5분혁신.거피취차]
현실이 끝내 이념을 이긴다
1. 개혁은 늘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작한다. 불공정을 바로잡겠다. 낡은 질서를 고치겠다. 더 많은 사람을 보호하겠다. 방향은 옳다. 명분도 선명하다. 문제는 그 문장이 현실에 도착한 다음부터다.
2. 회의실에서 완벽했던 원칙이 현장에서는 복잡한 절차가 된다. 권력을 나누려 만든 제도가 바카라임까지 흩어놓는다. 약자를 보호하려 만든 규정 때문에 정작 도움이 절실한 사람의 문턱이 더 높아졌다. 더 많은 서류를 준비해야 한다. 더 많은 창구를 헤매다녀야 한다. 정바카라은 의도로 시작하지만 사람은 결과를 산다.
3. 여기서 개혁의 첫 번째 시험이 시작된다.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을 때 무엇을 의심하는가. 설계인가, 현실인가. 자기검증을 외면한 개혁은 현실을 의심한다. 기존 질서의 저항이라 몰아붙인다. 개혁 취지에 대한 몰이해라 탓한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작동하지 않는 제도를 현실의 탓으로 돌리는 순간 개혁은 길을 잃는다.
4. 이념은 세상을 선명하게 나눈다. 정의와 불의, 전진과 퇴행, 옳음과 그름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람마다 처지가 다르다. 제도 하나를 움직이면 예산과 인력, 업무와 바카라임이 함께 움직인다. 누군가의 편익이 다른 누군가의 부담이 된다. 이념은 예외를 지우지만 현실은 예외들로 가득하다.
5, 선명함도 함정이다. 타협하지 않는 태도는 용기처럼 보인다. 빠른 추진은 결단력처럼 보인다. 반대 의견은 개혁을 가로막는 소음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비판은 개혁의 적이 아니다. 시행 전 결함을 찾아내는 충돌 시험이다. 그 시험을 건너뛰면 오류의 비용을 현실 속 사람들이 떠안는다.
6. 현실은 이념이 실제 삶에 만들어낸 결과의 총합이다. 절차가 쉬워졌는가, 비용은 줄었는가. 바카라임이 분명해졌는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길이 열렸는가. 현실은 이념의 반대편이 아니다. 이념의 시험대다. 위험 신호가 반복해서 나오는데 명분만으로 버티고 있지는 않은가.
7. 성인무상심, 이백성심위심(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도덕경 49장의 문장이다. 성인은 고정된 자기 마음이 없다. 백성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 신념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자기 생각을 절대화하지 말라는 경계다. 현실이 아우성을 치는데도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불통의 고집이자 집착일 뿐.
8. 목적은 붙잡되 방법은 유연해야 한다. 무엇을 이루려는지는 원칙이 정한다. 어떻게 이룰지는 현실이 가르친다.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는 사실이 나쁜 결과까지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9. 이상은 늘 아름답고 명쾌하다. 현실은 지저분하고 복잡하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은 '저기 멀리'의 이념 속이 아니다. '지금 여기'의 현실 속이다.
10. 좋은 이념은 현실을 무릎 꿇리지 않는다. 현실에 부딪히며 스스로를 고친다. 현실을 이기려는 이념은 끝내 현실에 패한다. 저기 멀리 있는 이념은 지금 여기의 현실을 이길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여기를 살고 있다. ⓒ혁신가이드안병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