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이후, 살아남는 전문가의 조건

[방구석5분혁신.디지털&AI]

[방구석5분혁신=안병민] 오래된 철물점이 있다. 천장까지 닿는 서랍장 안에는 크고 작은 나사와 각종 부품이 빼곡히 들어 있다. 주인은 그 위치를 모두 기억했다. 손님이 망가진 부품 조각을 들고 오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서랍을 열었다. 틀림없이 그 부품이 나왔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장인이라 불렀다.


어느 날 가게에 재고 스캐너가 들어왔다. 부품 사진을 찍자 서랍 번호가 바로 떴다. 주인의 권위가 흔들렸다. 사람들은 그제야 알았다. 그동안 장인의 힘이라 믿었던 것 중 상당 부분이, 단순히 수많은 서랍들 속 부품 위치를 기억하는 능력이었다는 것을.


서랍을 찾는 능력은 기계로 대체된다. 하지만 부품이 왜 망가졌는지, 어떤 대체품을 써야 하는지, 손님의 현장 조건이 어떤지는 다른 문제다. 같은 나사라도 들어갈 자리가 다르다. 같은 부품이라도 버텨야 할 무게가 다르다. 기술은 장인을 밀어내지 않는다. 장인의 가치가 어디서 나오는지 다시 묻는다.


이제 같은 질문이 전문가를 향한다. AI가 뒤흔드는 것은 전문가의 직업이 아니다. 전문가라는 명함 위에 쌓인 권위의 근거다. 전문가의 정체성이다.


그간 전문가 권위의 대부분은 머릿속 서랍장에서 나왔다. 의사는 병명과 처방을 꺼냈다. 변호사는 법조문과 판례를 꺼냈다. 컨설턴트는 경영이론과 프레임워크를 꺼냈다. 전문가는 필요한 답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그것을 빠르게 꺼내는 사람이었다. 정보의 비대칭. 그 차이가 곧 전문가의 몸값이었다.


AI는 이 격차를 빠르게 좁힌다. 증상과 검사 결과를 넣으면 의심 질환과 처방 후보가 뜬다. 사건 자료를 넣으면 관련 조문과 판례가 정리된다. 기업 데이터를 넣으면 분석틀과 보고서 초안이 만들어진다. 높은 선반 위에 잠겨 있던 지식이 이제 화면에 바로 뜬다.


무너지는 것은 '정답형 전문성'이다. 정답형 전문성이 뭐냐고? 이미 존재하는 답을 기억하고, 그 답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필요한 순간 빠르게 꺼내 적용하는 능력이다. 문제의 기준을 새로 세우기보다 주어진 질문에 맞는 답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오랫동안 전문가의 높은 몸값을 지탱해온 능력이다.


데이터가 충분하고 피드백이 뚜렷한 영역에서는 기계가 더 빠르다. 더 정확하다. 지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무엇을 물을지, 무엇을 버릴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할지다.


회의실 풍경도 바뀐다. 과거의 전문가? 매끄러운 답을 내놓는 사람이었다. 오늘의 전문가는 질문의 구조를 바꾸는 사람이다.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무엇이 잡음인지 가려낸다. 주어진 질문의 전제를 다시 묻는다. 숫자 뒤의 현장 맥락을 읽는다. AI가 제시한 답이 어떤 비용과 바카라임을 낳을지 따진다.


AI는 승소 확률을 계산한다. 하지만 전 재산을 건 의뢰인에게 소송을 접자고 말하는 일은 계산이 아니다. AI는 치료 가능성을 예측한다. 하지만 절망에 빠진 환자와 가족 앞에서 치료 중단을 논의하는 일은 예측이 아니다. AI는 감원 효과를 시뮬레이션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일을 멈추고 그 후폭풍을 감당하는 일은 단순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다.


판단은 그래서, 패턴 계산보다 무겁다. 판단에는 늘 결과가 따라 붙어서다. 누군가에게는 비용이 발생하고, 누군가에게는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진짜 전문성은 정답을 많이 아는 능력이 아니다.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기준을 세우고, 선택의 비용을 설명하고, 실패했을 때 도망가지 않는 태도다.


AI 이후의 전문가는 세 가지로 살아남는다. 첫째, 문제를 다시 정의하는 힘이다. 둘째, 맥락을 읽고 기준을 세우는 힘이다. 셋째, 결정의 결과를 설명하고 감당하는 힘이다. 이름하여 '바카라임형 전문성'이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전문가는 AI보다 느린 검색창일 뿐.


다시 철물점으로 돌아가 보자. 스캐너는 서랍 번호를 알려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부품이 왜 부서졌는지, 같은 고장이 다시 나지 않게 하려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손님이 정말 바꿔야 할 것이 부품인지 아니면 사용 방식인지는 스캐너가 알 수 없다.


살아남는 장인은 서랍을 빨리 찾는 사람이 아니다. 고장의 맥락을 읽는 사람이다. 살아남는 전문가도 다르지 않다. 끝내 물어야 할 질문을 붙들고, 맥락에 맞는 기준을 세우며, 그 답이 현실에 남길 무게를 오롯이 감당하는 사람이다. ⓒAI혁신가이드안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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