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정답이 없다는 게 참인가

반전의 시대 - 우리가 모르던 세상의 진짜 얼굴

by왜사는가

세상을 움직이는 불편한 진실들〈060〉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학교 미술 시간에도, 음악 감상 시간에도 선생님들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느낌이 정답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가 맞습니다"라고. 이는 창의성을 격려하고 개인의 해석을 존중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예술에는 정답이 없을까? 아니면 '정답이 없다'는 명제 자체가 또 다른 종류의 규범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예술 교육과 비평의 현장에서는 분명 특정한 해석을 '옳다'고 평가하고, 다른 해석을 '틀렸다'고 평가한다. 예술에 정답이 없다는 주장은 미학적으로 타당한가, 아니면 예술을 통제하기 위한 또 다른 이데올로기는 아닐까?


'정답이 없다'는 명제의 역설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 자체가 모순을 내포한다. 이 명제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 정답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명제는 모든 해석이 동등하게 타당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실제로 예술 교육과 평가의 현장을 보면, 모든 해석이 동등하게 취급되지는 않는다. 대학 입시 미술 시험에서 학생들은 정해진 기준에 따라 평가받는다. 음악 이론 시험에서는 정답이 있다. 문학 분석에서도 '올바른 해석'과 '잘못된 해석'이 구분된다. 따라서 '정답이 없다'는 명제는 실제 현실과 맞지 않는다. 또한 이 명제는 일반인과 전문가를 구별한다. 전문가(미술사학자, 음악 이론가, 문학 비평가)의 해석은 '올바르다'고 취급되지만, 일반인의 해석은 '개인적인 느낌'으로만 취급된다. 즉, '정답이 없다'는 주장 속에서도 권력의 위계가 작용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보면, 예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강요한 시대들이 있었다. 나치는 특정 미술만을 '올바른 독일 미술'이라 했고, 소비에트는 특정 미술만을 '올바른 슬롯주의 미술'이라 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현대에 와서는 '모든 해석이 타당하다'는 입장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것도 또 다른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


예술의 형식적 규칙과 기술적 정답


한편, 예술에는 분명히 정답이 있는 영역도 있다. 음악 이론에서는 화성 진행의 규칙이 있다. 특정 화성 진행은 '올바르다'고 평가받고, 다른 진행은 '틀렸다'고 평가받는다. 물론 이 규칙도 문화와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특정 시대와 문화 내에서는 규칙이 있다. 미술도 마찬가지다. 원근법, 비례, 해부학적 정확성 같은 기술적 기준이 있다.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얼굴 비례를 틀리면 '기술적으로 틀렸다'고 평가받는다. 문학도 문법 규칙이 있고, 문체의 일관성 같은 기준이 있다. 따라서 '정답이 없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적어도 기술적 수준에서는 정답이 있다. 또한 특정 예술 작품이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가'라는 질문에는 일정한 정답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전쟁의 참상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것은 작가의 의도에 근거한 정답에 가깝다. 반면 '게르니카'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개인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 경우에는 정답이 없을 수 있다. 즉, 예술은 '작가의 의도'와 '감상자의 해석'이라는 두 차원을 가진다. 첫 번째 차원에서는 정답이 있고, 두 번째 차원에서는 다양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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