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론_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을 펼치는 동안, 나는 자꾸 바카라 밖을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자유를 말한다. SNS 피드 위에, 광장의 구호 속에, 일상의 대화 사이사이에도.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신과 다른 의견 앞에서 사람들은 쉽게 불편해진다.
반박보다 차단을, 토론보다 침묵을 선택한다. 다수의 생각 안에 머무는 것은 안전하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서, 밀은 인간의 자유와 사고가 멈출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밀은 벤담의 제자였지만, 벤담을 넘어섰다.
공리주의의 아버지 벤담이 행복을 수치로 환산하려 했다면 —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이 행복하면 그것이 선(善)이다 — 밀은 그 계산식에서 빠진 무언가를 보았다.
인간 정신의 성장, 개성, 그리고 생각의 다양성.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 것들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칸트 역시 스쳐 지나갔다.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대하라'는 그의 명령은 인간 존엄의 절대성을 말하지만, 밀이 붙잡은 것은 조금 다른 지점이었다.
칸트가 보편적 도덕 법칙을 세우려 했다면, 밀은 오히려 보편이라는 이름 아래 눌려버리는 개인을 구하려 했다.
밀의 질문은 이것이다.
다수가 옳다고 해서, 그것이 진실인가.
역사는 언제나 소수가 옳았던 순간들로 가득하다.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 노예제를 반대한 사람들, 여성도 투표해야 한다고 외친 목소리들.
그 시대의 다수는 그들을 향해 침묵을 요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우리는 안다 — 진실은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밀이 두려워한 것은 폭군의 억압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조용하고 더 은밀한 억압, '슬롯적 여론'의 압력이었다. 법이 아니라 시선으로, 형벌이 아니라 배제로 작동하는 그 힘.
우리는 지금 그 무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느껴지는 그 서늘한 감각을 알고 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종교와 교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었다.
밀은 신앙 자체를 공격하지 않는다.
그가 경계한 것은 어떤 믿음이든, 절대적 진리로 굳어져 더 이상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순간이다. 신약성서의 가르침조차, 그것이 맹목적 복종의 도구가 될 때 인간의 사고와 개성은 멈춘다고 그는 썼다.
이것은 종교를 넘어, 이념과 상식과 '당연함'으로 포장된 모든 것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생각이 멈춘 자리에서 자유는 껍데기만 남는다.
그래서 『자유론』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는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불편한 질문들의 연속이다.
왜 우리는 서로를 침묵시키려 하는가.
왜 자신의 확신을 절대화하는가.
왜 다른 생각을 접하는 것이 이토록 두려운가.
생각하지 않는 슬롯는 조용할 수 있다.
그러나 조용한 슬롯가 살아 있는 슬롯는 아니다. 인간의 모든 전진은, 익숙한 정답이 아닌 불편한 질문에서 시작되었으니까.
바카라을 덮고 한참을 그 여운 속에 앉아 있었다.
밀이 진짜로 쓰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자유라는 단어 이전에 존재하는 무언가였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 그것이 자유의 조건이자, 자유의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