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딩 코리아 3부

열두 권의 바카라이 그리는 하나의 질문

by부소유

3부의 시작은 뜻밖에도 무거운 이야기로 열렸다. 정재승 교수의 근황을 묻는 질문에, 그는 최근 연구실에서 진행 중인 작업 하나를 짧게 언급했다. 한 해 동안 세상을 떠난 이들이 남긴 유서를 인공지능으로 분석해, 그들이 마지막 순간 누구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싶어 했는지를 살피는 연구라고 했다. 우리 슬롯가 들어야 할 이야기라는 그의 말은 짧았지만, 오늘 세 시간 동안 이어질 대화 전체의 밑그림을 미리 그려 보이는 듯했다. 결국 이 자리에서 다뤄진 열두 권의 바카라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의 말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카라과 유튜브 중 무엇이 뇌를 더 쓰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에서도 정재승 교수는 흥미로운 답을 내놓았다. 유튜브 영상은 강물에 떠내려오는 나뭇잎을 손으로 건지는 것처럼 수동적으로 흘러가지만, 바카라은 불친절한 매체라서 독자가 가진 지식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뇌를 찍어 보면 바카라을 읽을 때 뇌 전체가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했다. 다만 그만큼 쉽게 졸리다는 단점도 솔직하게 덧붙였다.


3부에서 처음 다룬 새 바카라은 안광복 선생님의 <21세기 택리지>였다. 조선시대 이중환의 <택리지>를 현대적으로 다시 쓴 바카라이다. 안광복 선생님은 이 바카라이 던지는 네 가지 기준 - 지리, 생리, 인심, 산수 - 을 오늘의 언어로 바꿔 설명했다. 역세권, 상업 지구, 지역 문화 수준, 그리고 도서관이나 영화관 같은 문화시설의 근접성. 그는 이 바카라이 정작 충북에 대해서는 짧은 한 문장으로만 스쳐 지나간다는 점을 아쉬워하면서도, 그 여백이야말로 청중 각자가 채워야 할 몫이라고 읽었다. 정재승 교수는 이 바카라이 1부의 <도시 관측소>와 결을 같이한다고 짚었다. 도시 관측소가 서울과 해외 도시 중심이라면, 이 바카라은 전국 곳곳의 역사적 맥락을 짚어준다는 것이다. 박혜진 평론가는 여기서 통영과 개성이라는 두 지명을 꺼냈다. 아무 연고 없던 통영이 박경리와 유치환의 흔적을 만난 뒤 마음의 고향처럼 느껴지게 됐다는 경험, 그리고 박완서의 개성 상인 이야기를 통해 낯선 도시가 문학 속에서 발견되는 순간들. 그녀는 이런 지역의 서사가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는 귀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로 안광복 선생님이 소개한 바카라은 서동욱 교수의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였다. 프랑스 철학을 전공한 저자가 거대 이론이 아니라 삶의 작은 순간들에서 진리를 길어 올리는 에세이다. 안광복 선생님은 분리수거를 하다 짜증이 밀려온 순간, 쓰레기를 만드는 과정 자체를 되짚어보는 저자의 사유를 예로 들었다. 귀뚜라미에게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이 더는 벌레가 아니라 가족이 되어버리는 이야기도 함께 전했다. 이건우 평론가는 여기서 “유”라는 한자가 원래 기우제를 지내던 무당을 가리키는 글자였다는 점을 짚으며, 날씨를 바꾼다는 제목이 인문학의 오래된 본성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고 풀이했다. 박혜진 평론가는 이 바카라이 어려운 철학서임에도 일 년 만에 16쇄를 찍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며, 문학과 철학이 만나는 지점에서 저자만의 목소리를 성공적으로 세운 바카라이라 평했다.


세 번째 바카라은 김겨울 작가가 직접 소개한 이승연의 <손절 슬롯>였다.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의 신자유주의 개념을 빌려, 우리가 인간관계마저 투자와 손절이라는 경제적 언어로 재단하게 된 현실을 파헤치는 바카라이다. 안광복 선생님은 이 대목에서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꺼냈다. 얼굴도 모르는 학생이 상담을 청하는 이메일을 보내왔을 때, 예전 같으면 자연스러웠을 그 접촉이 지금은 오히려 조심스럽고 위험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선배 교사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먼저 말을 걸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던 일화도 함께 나눴다. 그는 관계란 원래 선을 넘으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배우는 기술인데, 요즘은 그 과정 자체가 생략되면서 사람들이 저마다의 방으로 흩어지고 있다고 했다. 정재승 교수는 이 바카라을 열두 권의 한가운데 놓아도 될 만큼 본질적인 바카라이라 평하며, 인간관계에 투자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읽어냈다. 박혜진 평론가는 최근 유행하는 “각할모”이라는 신조어를 예로 들었다. 연결되고는 싶지만 깊어지고 싶지는 않은, 딱 그만큼의 거리를 원하는 요즘의 관계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폭탄 위에 이불을 덮어두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결국 갈등을 부딪쳐 해결해내는 “인간의 실력”이라고 짚었다.


마지막 바카라은 다시 김겨울 작가가 고른 박동수의 <동료에게 말 걸기>였다. 철학바카라 편집자인 저자가 적도 동지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 있는 “동료”라는 개념으로 대화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바카라이다. 정재승 교수는 이 바카라이 열두 권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 - 빈방에 홀로 있는 당신이 어떻게 타인과 연결될 것인가 - 에 대한 사려 깊은 철학적 조언이라 평했다. 안광복 선생님은 여기서도 자신의 경험을 나눴다. 초과 수당 삼만 원을 받지 못해 자존심이 상했다던 동료 교사의 말을, 표면적인 논리가 아니라 그 밑에 쌓인 마음으로 들었어야 했다는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왜 저 사람은 나처럼 명예를 생각하지 않을까“가 아니라 ”나도 혹시 저 사람처럼 이익만 바라보지 않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오늘 이 자리에서 나온 어떤 문장보다도 실천적이었다.


세 시간에 걸친 이 자리의 끝에서, 다섯 사람은 각자 12권의 바카라을 관통해 얻은 소감을 나눴다. 안광복 선생님은 준비 과정에서 2주 동안 12권을 완독하며 얻은 것이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였다고 고백했다. 박혜진 평론가는 글쓰기가 인류가 오랫동안 만들어온 치료제라며, 이를 대체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포기하는 순간 우리가 잃는 것이 크다고 강조했다. 이권우 평론가는 이 시대가 스스로 파괴에 이를 만큼 위험한 완숙의 지점에 도달했다는 경고를 전했다. 정재승 교수는 열두 권의 바카라이 디지털 문명이 우리를 더 편리하게는 했지만 더 행복하게는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정리하며, 다음에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처럼 인간을 우주적 스케일에서 내려다보는 바카라도 함께 읽고 싶다는 바람을 남겼다.


세 번의 시간, 열두 권의 바카라,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시선. 결국 이 모든 대화가 향한 곳은 하나였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서로에게 말을 걸 것인가. 도시를 관측하는 것에서 시작해 마음의 날씨를 살피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 한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고전 속 설득의 기술을 배우고, 쾌적함의 대가를 묻고, 혼자 사는 삶의 필연성을 짚고, 마침내 동료에게 말을 거는 것으로 끝나는 이 열두 권의 여정은, 어쩌면 하나의 긴 문장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침표는 없다. 그 문장을 이어 쓰는 것은 이제 각자의 몫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