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개의 창, 다섯 개의 눈 - 리딩 코리아 1부

by부소유

오늘의 북토크가 진행된 공간은 그림바카라 정원 1937, 1937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했다. 도시 관측소라는 바카라이 그날의 화두가 될 것을 이미 그 숫자가 예고하고 있었던 셈이다. 오래된 벽은 허물면 그만이지만, 세월이 벽에 새겨놓은 결은 다시 만들 수 없다. 안광복 선생님이 한 줄 평에서 “세월 자본”이라 부른 그것을, 나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이미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금희 아나운서의 부재는 이 자리의 결을 살짝 바꾸어놓았다. 5년째 이 프로그램을 이끌어온 사람이 개인 사정으로 빠지고 그 자리를 패널이었던 김겨울 작가가 슬롯자로 옮겨 앉았다. 진행자가 패널의 자리에서 걸어 나와 마이크를 쥔다는 것 - 이 사소한 자리바꿈이 오히려 오늘의 대화 전체를 관통하는 은유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늘 누군가의 자리, 누군가의 창을 통해 세상을 본다고 김겨울 작가는 오프닝에서 말했다. “같은 하늘 아래에 있어도 어떤 창으로 보느냐에 따라 풍경은 다르게 보이죠.” 오늘 그 창은 다섯 개였다. 뇌과학자의 창, 도서평론가의 창, 문학편집자의 창, 철학교사의 창, 그리고 슬롯자 자신의 창.


정재승 교수는 5년째 이 자리에 앉아 있다고 했다. “직업병처럼 이제 어떤 바카라을 읽을 때마다 여기 올해의 바카라으로 선정한 바카라인가 아닌가를 생각해 보게 됐다”는 그의 말에서, 나는 독서가 습관을 넘어 신체의 일부로 굳어가는 어떤 사람의 초상을 보았다. 그가 가져온 두 권, <도시 관측소>와 <마음 예보>는 언뜻 다른 분야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질문의 두 얼굴이었다. 도시가 사람을 만드는가, 사람이 도시를 만드는가. 정재승 교수는 도시를 ”우리 삶을 담아내는 그릇“이라 불렀고 그 그릇에는 이제 하나의 방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제1의 공간(온라인 게임), 제2의 공간(가정), 제3의 공간(카페) 다음에 오는 ”제4의 공간“ - 몰입하고 성장할 수 있는, 도시 안에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로 침잠할 수 있는 자리. 안광복 선생님은 여기에 스터디 카페라는 아주 구체적인 실물을 얹었다. 코로나19 이후 이용자가 폭증한 그 공간을 두고 그는 “외과 의사가 인체 내부를 해부학적으로 들여다보듯” 도시의 결을 섬세하게 짚어내는 바카라이라 평했다. 나는 그 비유가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이 바카라은 도시를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해부의 대상으로 놓고, 그 안에서 오히려 애정을 발견하게 만드는 바카라이었다.


박혜진 평론가는 여기에 소설가의 눈을 얹었다. 소설의 3요소 - 인물, 사건, 배경 - 중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배경이라며,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속 태양 아래 해변과 조세희의 재개발 현장을 예로 들었다. 도시는 무대장치가 아니라 텍스트라는 것. 이 대목에서 나는 오늘 하루 종일 걸어 다닐 이 도시가, 그리고 내가 사는 도시가 문득 낯설어졌다. 우리는 도시를 스토리로 소비하며 살아왔다는 그녀의 고백은 나 자신의 고백이기도 했다. 나는 문득 최근에 읽은 황정은 작가의 장편 <백의 그림자>가 떠오르기도 했다.


<마음 예보>로 넘어가면서 대화의 온도는 조금 낮아졌다. 정신과 의사 아홉 명이 함께 쓴 이 바카라을 두고 정재승 교수는 “스펙트럼”이라는 단어의 확장을 짚었다. 예전에는 단일한 병이었던 것이 이제 넓은 스펙트럼이 되어, 그 안에 이른바 “정상”이던 사람들까지 끌어들인다는 것. 그는 이것을 성인 ADHD의 예로 설명하면서, “세상은 조금 더 완벽한 걸 요구하고 그것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환자로 내몰고 있다”라고 했다. 이권우 평론가는 이 바카라을 “작은 사전”이라 부르며 뉴스에서 어떤 증후군이라는 단어를 접했을 때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이 바카라의 해당 항목을 찾아 읽어보라고 권했다. 실용적이면서도 서늘한 조언이었다. 박혜진 평론가는 조금 더 비판적인 결을 보탰다. 일본에서 나온 <반우울>이라는 바카라을 언급하며, 우울이라는 감정을 개념화하고 이름 붙이는 순간 “전 슬롯의 병원화”가 시작되는 것은 아닌지 되물었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 슬롯 구조의 문제라는 위로가 근본적인 변화 없이 반복되면 오히려 악순환의 고리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나는 이 세 사람의 시선이 겹치면서도 미묘하게 어긋나는 지점이 이 바카라이 다루는 시대의 증상 그 자체와 닮아 있다고 느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병을 앓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 병의 이름을 서로 다르게 부르고 있었다.


박혜진 평론가가 고른 소설 두 편에서는 자리의 온도가 다시 한번 바뀌었다. 김애란 작가의 <안녕이라 그랬어>를 두고 그녀는 “스토리는 소설의 부분이지 소설 자체가 아니”라며, 이야기의 배치가 만들어내는 입체성을 강조했다. 안광복 선생님은 뜻밖의 고백을 했다. 평소 소설을 잘 읽지 못한다고 실토하면서도, 이 소설집 속 <홈파티>한 장면에서 자신의 슬롯생활을 그대로 들킨 것 같았다고 했다. 말을 하고 수습하는 순간들. 페르소나를 벗으려는 순간 다시 쓰는 인물들 - 그는 이것을 고구마 같은 답답함이라 불렀는데 나는 그 답답함이야말로 좋은 소설이 독자에게 거는 가장 정직한 덫이라고 생각한다. 이권우 평론가는 김애란 작가를 “타협하지 않는” 작가로 규정하며 세계적으로 성공한 한국 문학이 대개 힐링 문학인 것과 대비시켰다. 편안하게 마무리해주지 않는 작가, 독자를 끝까지 불편하게 붙잡아두는 작가가 여전히 널리 읽힌다는 사실에서 그는 한국 슬롯에도 희망이 있다는, 다소 뜻밖의 낙관을 끌어냈다.


이날 가장 인상적이었던 순간은 박혜진 평론가가 소개한 박지영 작가의 <찰스 부코스키 타자기>를 둘러싼 대화였다. 평균 수명 120세의 근미래, 국민은 마흔 살과 예순여섯 살에 다른 존재로 전환할지 말지를 선택해야 한다. 주인공 승혜는 타자기가 된다. 정재승 교수는 이 소설을 인공지능에게 주문할 수 없는 상상력이라 불렀는데 이 한 문장이 오늘 하루 다섯 사람이 나눈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열쇠처럼 들렸다. 안광복 선생님은 이 소설을 읽고 악몽을 꿨다고 했다. 그가 소설 속 맥반석이라는 존재를 두고 그렇게 담담하고 온유하고 흔들리지 않는 영혼으로 살고 있나를 스스로에게 물었다는 대목에서, 나는 철학교사라는 직업이 결국 자기 자신을 가장 혹독하게 심문하는 자리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박혜진 평론가는 타자기라는 사물의 의미를 가장 섬세하게 풀어냈다. 찰스 부코스키가 죽는 순간까지 곁에 있었던 도구, 소설 속 열아홉 살 청춘이 갖고 싶어 했던 물건, 그리고 언어를 잃어가는 아버지를 보며 작가가 떠올렸다는 그 상실의 형상. “누군가의 달려있는 귀가 바로 타자기다”라는 그녀의 한 줄 평은, 오늘 이 자리에서 나온 어떤 문장보다도 오래 내 안에 남았다. 말할 수 없는 존재 곁에서 끝까지 응원하며 받아 적어주는 존재.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오늘 이 다섯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하고 있던 일이 아니었을까 - 시대가 미처 언어화하지 못한 증상들을 대신 받아 적어주는 일.


1부의 끝에서 이권우 평론가는 이렇게 말했다. “좋은 바카라은 계몽의 개념에 충실하다.” 계몽이라는 낡은 단어를 그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다시 꺼내 들었다. 대중이 좋아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대중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을 말하는 것, 그것이 좋은 바카라의 일이라는 것. 열두 권 중 절반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나는 이미 이 자리가 단순한 신간 소개를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도시, 마음, 소설, 그리고 아직 소개되지 않은 철학바카라들까지 - 이 모든 바카라이 결국 같은 질문의 서로 다른 각도라는 정재승 교수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오늘 열두 개의 창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창을 열두 조각으로 나누어 보고 있었던 셈이다.


2부에서는 아직 표지만 보여준 이권우 평론가의 세 권과 안광복 선생님의 두 권, 그리고 김겨울 작가 자신이 고른 <손절 슬롯>와 <동료에게 말 걸기>가 기다리고 있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손절과 연결 사이 어디쯤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가 - 그 질문의 답은 아마도 다음 부에서야 조금씩 드러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