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여자라서

18

by라한

18. 여자라서

문이 열리기도 전에, 빈청 문틈으로 언성부터 새어 나왔다.

빈청이란 정승과 판서들이 대궐에 들어와 나라의 큰일을 의논하고, 임금의 부름을 기다리며 대령하는 집. 여느 날이면 낮은 말소리와 찻잔 소리나 오가는 그 집이, 오늘은 문풍지가 떨릴 만큼 소란했다. 마루 아래에서 신을 벗던 예지는 잠깐 그 소리에 귀를 세웠다. 말들의 토막이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벼슬이 가당키나, 하는 토막. 나라 꼴이, 하는 토막.

'회의 시작 전부터 이 열기라니. 다들 참 부지런하셔.'

이 자리를 위해 예지 쪽도 부지런을 떨었다. 며칠 밤을 들여 오늘 오갈 문답을 미리 그려 본 것이다. 저들이 무엇을 물을지, 어느 순서로 밀고 올지, 어느 대목에서 성을 낼지. 종이에 적어 가며 상대의 수를 짚다 보니 어느 밤엔가는 제가 반대편에 앉은 것처럼 열을 내고 있어서, 곁에서 먹을 갈던 권신이 드물게 웃음기를 흘렸을 정도였다. 준비해 둔 것은 답이 못 되고, 물음의 순서 쪽이었다.

별시의 뒷일을 세자에게 맡긴다는 어명이 내려온 뒤로, 조정의 물밑은 오히려 더 끓고 있었다. 상소로는 안 되고 조참에서는 눌렸으니, 남은 길은 마주 앉는 자리뿐이었다. 그 자리를 예지 쪽에서 먼저 청했다. 피할수록 등 뒤에서 자라는 것이 조정의 말이라는 것을, 상소의 산에서 배운 터였다. 안건은 처음부터 하나로 못 박혀 있었다. 별시 장원의 임관, 그러니까 홍패를 받은 자에게 벼슬을 내려 관원으로 세우는 일.

예지가 문지방을 넘어서자 언성이 뚝 그쳤다.

넓은 마루방에 중신 여남은이 늘어앉아 있었다. 조참에서 출반했던 흰 수염의 원로 대감이 아랫목 쪽에 앉았고, 사랑방 밀담의 검은 수염이 그 곁이었다. 예조의 자리만 비어 있었는데, 실무가 밀렸다는 전갈이 와 있다 했다. 방 한쪽 구석의 낮은 서안에는 사관 둘이 붓을 세우고 앉아 있었고, 그 한 자리에 채윤이 앉아 있었다. 이 방의 말들을 토씨 하나 흘리지 않고 적는 소임으로 들어온 것이다. 눈이 스쳤지만 서로 아는 체는 없었다.

"앉으시지요, 저하."

"앉지. 다들 서서 싸울 기세더니, 앉아서들 하세."

가볍게 던진 말에 웃는 사람은 없었다. 개의치 않고 예지는 상석에 앉으며 방 안을 한 바퀴 둘러 세웠다.

"오늘 자리는 내가 청했다. 별시 장원 나정은의 임관을 논하자는 자리다. 장원에게 벼슬을 내림은 나라의 법도이고, 법도는 미룰수록 우스워지니. 시작하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흰 수염 대감이 나섰다. 진작부터 기다리고 있던 입이었다.

"저하. 신들이 목숨을 걸고 아뢰옵니다. 어찌 여자가 과거를 치르고, 관리가 된단 말씀이옵니까!"

목소리가 문풍지를 떨게 했고, 여기저기서 옳소이다, 소리가 뒤를 받쳐 올라왔다. 앉은 채로 무릎걸음을 반 치씩 당겨 앉는 등들이 있었고, 헛기침으로 제 자리를 알리는 목청들이 있었다. 오늘 이 방에 앉은 수만큼의 상소가 지난 며칠 승정원을 지났을 것이다. 종이로 하던 말을 이제 입으로 하겠다는 자리였다. 예지는 그 소리들이 다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말을 아껴 가며 열었다.

"좋은 물음이네. 어찌, 라고 물으셨으니 나도 어찌를 따져 보지. 대감. 여인이 관리가 되면 안 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까닭이라니요. 그것은…."

"그것은?"

"국법이 그러하옵니다."

"국법이라. 좋네, 국법부터 보지."

예지는 미리 준비해 온 것을 꺼내 놓듯, 또박또박 짚어 나갔다.

"경국의 법 어디에 여인의 임관을 금한 조문이 있는가. 별시를 열 때도 같은 것을 물었네. 그때 아무도 조문을 가져오지 못했지. 녹명을 막는 조문이 없으니 녹명을 받았고, 응시를 막는 글이 없으니. 응시를 받았고, 채점은 이름을 가린 봉미 위에서 했네. 그 모든 관문을 법대로 지난 사람에게 벼슬길을 여는 것 또한 법이야. 법을 말하려거든 조문을 가져오게. 있는가."

물음이 떨어지자 방이 일순 조용해졌다.

"법에야 없어도, 예에는 있사옵니다. 남녀의 분별은 예의 근본이온데…."

"예와 법을 섞지 말게, 대감. 예는 사람 사이의 도리를 이르고 법은 나라가 금하고 허하는 일을 정하네. 벼슬은 나라가 내리는 것이니 법의 일이야. 예를 말하고 싶거든, 남녀유별이 여인의 재주를 묻으라는 가르침인지부터 다시 새겨 보고. 자리를 나누라는 말과 길을 막으라는 말은 다르네."

예와 법이 갈리는 소리에, 흰 수염 대감의 낯이 굳었다.

"…조문에야 없사오나, 전례가 없사옵니다."

"전례."

예지는 손가락 하나를 접어 보였다. 국법이라는 까닭 하나가 접힌 셈이었다.

"전례 이야기도 과장에서 이미 했네. 전례가 없다는 것은 오늘까지 누구도 안 했다는 말이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못 되네. 나라를 세운 일에도 전례는 없었어. 한양에 도읍한 일에도 전례가 없었고. 전례가 없어 못 한다면 이 나라부터가 서지 못했을 것이네. 다음 까닭을 대 보게."

"다, 다음이라니요."

"국법이 접혔고 전례가 접혔으니, 다음 까닭을 내놓으라는 말이네. 여인이 벼슬에 오르면 안 되는 까닭."

검은 수염 대감이 헛기침을 하고 나섰다.

"배움이 얕은 자가 어찌 나랏일을 다루겠사옵니까. 여인은 성현의 글을 깊이 익히지 못하였으니…"

"그 사람은 장원이네."

대감의 말허리가 중간에서 뚝 잘렸다. 예지는 자르고서, 자른 자리를 가만히 눌렀다.

"이름을 가리고 글만 보고 뽑은 장원. 채점한 것은 내가 못 되고 경들의 동료인 시관들이었네. 예조 당상까지 붓을 들었지. 그 붓들이 첫 자리에 올린 글을 두고 배움이 얕다 하면, 그것은 그 사람을 치는 말인가, 채점한 시관들을 치는 말인가. 대감은 지금 뉘 낯에 먹칠을 하는 셈인가."

"하, 하오나 장원 한 사람이 어찌 여인 전부를 증명하겠사옵니까."

"전부를 증명하라 한 적 없네. 벼슬은 전부에게 내리는 것이 못 되고 한 사람에게 내리는 것이니, 그 한 사람이 재주를 증명했으면 족하지. 문이란 본디 첫 사람이 여는 것이고, 첫 사람은 언제나 한 사람이야."

검은 수염이 말문을 닫자, 손가락이 하나 더 접혔다.

"배움도 접혔네. 다음."

"…여인은 몸이 약하옵니다. 관아의 일이란 고된 것이온데."

구석 자리의 젊은 축이 꺼낸 말이었고, 그쪽으로 예지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 사람은 지난 과장에서 매를 맞고 끌려 나가고도, 이번 별시에 제 발로 걸어 들어와 하루 내 붓을 놓지 않았네. 해가 서산에 걸릴 때까지. 그날 과장에서 먼저 지쳐 나간 것은 사내들 쪽이었지. 몸이 약해 못 견딜 것이라는 걱정은, 견뎌 낸 사람 앞에서는 걱정이 못 되고 트집일세. 다음."

"여인이 관아에 들면 사내 관원들이 일에 마음을 두지 못하옵…."

"그건 그 사내들의 흠이지 그 여인의 흠인가. 마음을 다잡지 못하는 관원이 있으면 그 관원을 벌하면 될 일. 다음."

접히는 손가락이 늘어 갈수록 방 안의 숨소리가 옅어졌다. 나서는 목소리의 사이가 점점 벌어졌고, 벌어진 사이마다 사관의 붓 소리만 사각사각 끼어들었다. 그 붓 소리가 한 번, 획 중간에서 아주 잠깐 멎었다가 이어졌다. 먹이 몰려 획 하나가 미세하게 굵어졌을 것이다. 방 안의 누구도 그 순간을 눈여겨보지 않았고, 상석의 예지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 방의 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적히고 있다는 사실이, 이제야 몇몇의 등을 곧추세우게 하는 모양이었다. 함부로 뱉은 까닭이 글자가 되어 남는 자리였다.

'하나씩 벗겨 보자고. 어디까지 남나.'

예지는 조금도 조급해하지 않았다. 며칠 밤 종이 위에 그려 본 것이 바로 이 순서였다. 안 되는 까닭을 대개 하고, 그 까닭을 하나씩 받아서 접는다. 국법, 전례, 배움, 몸, 풍기. 겹겹이 입은 옷을 한 벌씩 벗기다 보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이 방의 모두가, 저마다의 눈으로 보게 만드는 것. 이기는 것이 목적이 못 되고, 드러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자, 대감들."

예지는 접었던 손가락들을 하나씩 도로 펴 보였다.

"국법에 없고, 전례는 이유가 못 되고, 배움은 장원이 증명했고, 몸은 과장이 증명했고, 풍기는 사내들 단속으로 될 일이라 했네. 다 접히고 나니, 이제 남은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방 안의 어느 입도 열리지 않았다. 답을 몰라 못 하는 침묵이 못 되고, 답이 너무 빤해서 못 하는 침묵 쪽이었다.

"남은 것은 하나뿐이네. 여자라서."

예지는 그 넉 자를 방 한가운데에 내려놓았다.

"국법도 전례도 배움도 몸도 다 걷어 내고 나면, 경들의 반대에 남는 알맹이는 그 넉 자야. 여자라서 안 된다. 까닭이 있어서 안 되는 것이 못 되고, 안 된다가 먼저 있고 까닭을 나중에 주워 붙인 것이지. 방금 이 방에서 그 까닭들이 하나씩 어떻게 접혔는지, 사바카라에 다 적혔을 것이네."

사바카라, 사관이 적어 두는 기록의 초고를 이르는 말이었다. 그 한마디에 몇몇의 눈이 저도 모르게 구석의 낮은 서안 쪽으로 스쳤다가 돌아왔다. 붓을 쥔 채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다만 붓을 쥔 손등에 힘줄이 옅게 서 있었다.

"여자라서, 가 나라의 까닭이 될 수 있는가. 나는 그것을 묻자고 이 자리를 청했네."

침묵이 이대로 끝나려나 싶은 길이만큼 이어지고 나서, 흰 수염 대감이 몸을 고쳐 앉았다. 굳었던 낯이 어느새 도로 펴져 있었는데, 궁지에 몰린 낯이 못 되고 밀리던 자가 믿는 패를 마침내 꺼내 드는 낯이었다. 소매 춤에서 부채를 꺼내 무릎에 얹는 손짓까지가 느긋했다.

"저하께서 말씀을 참으로 잘하십니다."

목소리에 어느새 여유가 돌아와 있었다.

"국법이니 전례니 하는 것들이야 글줄 다루는 재주로 이리저리 접을 수 있겠지요. 하오나 저하. 글재주로도 접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사옵니다. 하늘이 정한 것 말이옵니다."

"하늘이 정한 것."

"그러하옵니다."

방 안의 결이 바뀌는 것이 살갗으로 느껴졌다. 밀리기만 하던 등들이 도로 펴지고, 접혔던 부채들이 하나둘 무릎 위로 나왔다. 저 패라면 해 볼 만하다는 낯들이었다.

대감이 방 안을 천천히 둘러 세는 눈길에는, 제 뒤에 늘어앉은 낯들의 수가 담겨 있었다. 그러고서, 아껴 두었던 그 말을 방 한가운데로 꺼내 놓았다.

"여인은 아이를 낳아야지 않습니까."

"옳은 말씀이네."

예지의 첫마디는 그것이었다.

밀리던 쪽이 마침내 코너에 몰렸다고 여긴 방 안의 낯들이, 그 뜻밖의 수긍에 잠깐 어리둥절해졌다. 흰 수염 쪽의 부채질도 반박을 놓쳤다. 예지는 그 틈을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여인이 아이를 낳지. 낳으니 대가 이어지고, 대가 이어지니 나라가 있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면, 그 근본을 낳는 것이 여인이야. 대감 말씀대로 하늘이 정한 일이지. 한데 대감, 내 하나만 묻세."

부채가 무릎 위에서 딱 멎었다.

"아이를 낳는 일이, 여인 저 하나 좋자고 하는 일인가."

"…그, 그것이 무슨."

"나라의 근본을 잇는 일이라 하지 않았나. 하면 그 일을 해내는 사람에게 나라가 무엇을 주었는가 말이네. 벼슬을 주었나, 녹을 주었나, 이름 석 자를 문서에 남겨 주기라도 했나. 족보를 펴 보게. 대를 이었다는 그 족보에 낳은 이의 이름이 어디 적혀 있나. 아무개의 처. 넉 자가 전부야. 아이는 여인이 낳는데, 족보에 오르는 것은 사내의 성이고, 대를 이었다는 공은 사내의 것이 되지."

방 안이 밑에서부터 술렁이기 시작했고, 예지는 그 술렁임 위로 말을 얹었다.

"경들의 말을 그대로 셈해 보세. 아이를 낳아야 하니 벼슬은 안 된다. 낳는 일 말고는 시키지 않겠다. 이름도 공도 주지 않겠다. 하면 그 말이 무슨 말이 되는가. 여인은 대를 잇는 그릇이라는 말 아닌가. 씨를 받아 사내의 성씨를 낳아 주는 그릇. 씨받이 말일세."

씨받이, 라는 석 자가 방 한가운데 떨어지자 술렁임이 뚝 그쳤다.

점잖은 자리에서 입에 올리는 말이 못 되었다. 올리는 말이 못 되어서, 올려진 순간 비켜설 데가 없는 말이기도 했다. 늙은 축 몇의 낯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하! 어찌 그런 상스러운…."

"상스러운가."

예지는 그 노기를 피하지 않고 마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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